영화 전설의 주먹을 보기 전, 그러니까 정확히는 예고편과 몇 장의 스틸 사진만을 보고 스크린 앞에 앉을 때까지만 해도 내가 기대한 것은 우리에서 풀려난 야수들의 이야기였다. 한때 거친 밀림 속에서 포요하며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경쟁하던 맹수들을 새로운 전설말이다. 그러나 스크린을 채우며 나타난 것은 어느덧 세월이 흘러 우두머리의 자리를 놓고 다투던 용맹한 수컷의 모습이 아닌, 이제는 어린 새끼들을 먹일 먹이감을 구하느라 지친 가장들이었다. 25-6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그 시절의 추억, 목숨과도 같았던 우정과 약속들을 지키는 세 친구들의 모습은 여전히 거칠지만 더 이상 그 안에서 야성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세 명의 친구들이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숨기고 살아가는 현실도 결코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싶을만큼 힘들고, 남은 것은 고통스런 상처뿐이다. 그들은 어린 시절의 어리석은 행동들을 후회하며, 세월이 지나도 아픈 상처들을 치유하기 원했다. 그렇기에 제각기 다른 사연으로 링에 올랐지만 그들이 원한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닌 본래 자신의 모습을 찾는 것이었다. 예전처럼 위풍당당하게 호령하던 젊은 수컷의 모습말이다.
강우석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격투신들로 스크린을 매끄럽게 채워 넣었다. 너무 과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이종격투기 시합들을 통해서 말이다. 유명한 원작 웹툰에서 프레임을 가져와 더욱 세련된 스타일의 영화로 만들어낸 강우석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렇다고 전설의 주먹이 흠잡을 곳이 없는 영화는 아니다.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영화 친구의 서울 버전"이었다.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는 1970년대 부산을 배경으로 거친 사나이들의 우정, 그리고 냉혹한 현실 속에서 변해버린 그들의 모습을 잔인하게 담은 작품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전설의 주먹은 198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삼았다는 것, 조폭들 간의 싸움이 아니라 케이블 채널의 이종격투기 프로그램이 마련한 링 위에서의 싸움이라는 것에서 다르다. 후반부로 갈 수록 전설의 주먹의 캐릭터들은 영화 친구의 준석(유호성), 동수(장동건), 상택(서태화), 중호(정운택)들이 부산 사투리를 버리고 서울말씨를 쓰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계속 받았다. 서울 남자들의 이야기라서 그런지 욕설도 말랑말랑하다. 배우 황정민의 모습에서 유호성의 얼굴이 보이고, 유준상이 장동건과 서태화를 섞어 놓은 듯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19세 이상 관람가 영화를 전체 관람가 TV 드라마로 각색한 느낌마저 들었다면 너무 과한 표현일까?
그러나 제일 아쉬웠던 것은 주인공인 황정민의 감정과 연기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는지 유준상과 윤제문의 연기가 너무 절제되어 보였다는 것이다. 전작들에서 보여준 두 배우의 역량을 고려할 때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장면에서도 감독은 클로우즈 업을 자제하고 건조한 전신샷으로 대신했다. 결론적으로 전설의 주먹은 유준상과 윤제문의 공통된 대사처럼 "멋있는 척"은 황정민에게만 허용된 영화였다. 원작 웹툰을 알고 있던 관객들은 강우석 감독이 스릴러로 가득한 원작 스토리에서 벗어난 것에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스토리 라인에 대한 욕심을 더 버리고 배우들에게 액션과 더불어 감성적 연기에 더 집중하기를 요구했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히려 액션은 세 배우들의 어린 시절을 맡은 배우들에게 넘기고 중년의 배우들에게는 아크로바틱에 가까운 고난이도 격투기술보다 감정선을 살리도록 요구했다면 더 나은 별점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도 전설의 주먹은 재미있고 즐겁고 더구나 짜릿한 느낌까지 주는 작품이었다. 청소년관람불가인 것이 너무나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