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 인수전, 최후의 승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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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채권은행단이 현대건설 매각을 초고속으로 추진하면서 현대차그룹과 청와대의 ‘특수 관계’가 의혹을 낳고 있다. 지난 6월부터 숨가쁘게 진행된 현대건설 매각 추진 과정을 보면 청와대의 ‘입김’이 영향 |
현대건설 제3자 매각 절차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현대차그룹)이 9월27일, 현대그룹이 10월1일 각각 인수의향서를 제출하면서 인수전은 범현대가 사이의 2파전으로 압축된 상황이다. 현대건설의 주요 주주가 채권 금융기관이고, 채권 금융기관들이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한 뒤 그 지분을 시장에 매각하는 형태의 인수·합병(M&A)은 보편적인 흐름이므로 어느 시점엔가 현대건설이 매각되는 것 자체는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그 과정에 공정하고 민주적인 시장 경쟁의 원리가 적용될지 여부는 중요한 국민적 관심사이다. 현대건설은 사실상 국민 세금으로 정상화된 ‘국민 기업’ 성격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재계와 금융권 그리고 건설업계 등 시장 한편에서는 현대건설 매각 과정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다는 의구심이 확산되고 있다. 현대건설 사장을 지낸 이명박 대통령과 청와대 일각에서 초고속으로 진행되는 현대건설 매각 추진에 모종의 역할을 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 그것이다. 의심의 배경에는 갑자기 유력한 인수 후보로 떠오른 현대차그룹을 둘러싸고 현대건설 매각 추진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와 채권은행단의 상식을 벗어난 무리한 행태가 자리하고 있다.
지난 8개월여 동안 현대건설 매각을 둘러싸고 정부와 시장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10년 초반까지만 해도 재계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 현대건설을 통해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에 나섰던 점, 현대건설 김중경 사장이 이명박 대통령과 과거 현대건설에서 근무한 각별한 사이라는 점 등을 들어 현대건설 매각을 급속히 추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대통령과 특수 관계였던 현대건설인 만큼 섣부른 매각 추진은 임기 중 논란은 물론 임기 후에도 자칫 큰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7월 초순 이후 현대차그룹이 현대건설 인수전에 가장 유력한 후보로 갑자기 떠오르면서 그 배경과 동기를 놓고 뒷말이 무성해졌다.
시장의 공감 없이 급하게 매각 추진
현대건설 매각은 현대건설 주주협의회 의결에 따라 결정된다. 현대건설의 주주협의회는 현대건설이 사적 화의에 돌입할 당시 채권단이었으나, 이후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하면서 현대건설의 주요 주주가 된 금융기관들 모임이다. 주주협의회를 구성하고 있는 주요 금융기관은 모두 9개. 이 중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관은 외환은행(8.92%), 정책금융공사(7.84%), 우리은행(7.46%)이다. 주주협의회의 실질적인 업무는 대표기관이 담당하는데, 현대건설의 대표 주주사는 외환은행이다.
하지만 구조조정 과정을 거쳐 공적 자금이 투입돼 정상화한 현대건설의 경우 매각과 같은 중요한 의사 결정은 내부적으로 정부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따라서 현대건설 매각 일정과 관련해서는 정부가 방침을 정리하고, 그 내용을 주요 채권 금융기관에 전달해 공식화하는 절차를 밟게 된다.
현대건설 매각은 지난 6월 초 한국정책금융공사 유재한 사장의 매각 절차 진행 발언을 기점으로 초고속으로 진행되었다. 그는 5월17일 <문화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당시 쟁점이었던 하이닉스에 대한 매각 작업을 유보하는 대신 현대건설 매각 작업을 진행해 9~10월 중에 우선협상 대상자를 선정하겠다고 말했다. 통상적으로 현대건설처럼 규모가 큰 기업의 매각은 다른 대규모 기업 매각과 중첩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뿐 아니라, 높은 매각 가격을 받기 위해 사전에 시장에 매각 절차 진행을 공지한 뒤 본격적인 절차를 밟는다. 그러나 현대건설 매각은 사전에 시장의 공감을 얻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이고 급작스럽게 발표됐다. 더구나 현재 대우건설 매각도 완료되지 않은 상태다.
외환은행, 현대그룹을 압박하다
<DIV align=right>ⓒ청와대 제공</DIV>이명박 대통령은 유난히 현대·기아차그룹에 애정을 보여왔다. 1월24일에도 이 대통령은 정몽구 회장과 인도 첸나이 현대차 공장을 방문해 생산라인을 둘러보았다. |
이후 현대건설 채권단인 주주협의회는 외환은행의 주도 아래 실무자 회의를 개최하여 현대건설 매각 일정을 보고했다. 2010년 10월 입찰 공고를 내서 참여 기업의 인수의향서를 접수하기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뒤 채권은행단은 다시 입찰 공고 일정을 추석 이전으로 당기기로 하고, 입찰 공고 직후 곧바로 투자의향서를 접수받아 예비 입찰자를 선정한 후 최종 입찰자를 10월 안에 선정한다고 밝혔다. 이어 본입찰은 2010년 11월 초순에 진행하고 11월 말까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겠다고 했다.
M&A 업계에서는 이 같은 이례적 초고속 매각 진행은 굳이 입찰을 통해 투자자 간 경쟁을 유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될 경우라고 판단한다. 즉 인수할 자가 이미 내정돼 있거나, 인수 경쟁을 회피시키고자 할 때를 제외하고는 상식적이지 못한 입찰 절차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껏 국내에서 실시된 1조원대 이상 대형 M&A 일정은 매각 공고가 나간 뒤 양해각서 체결까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진행됐다. 대우건설은 7개월, 대우종합건설은 10개월, 현대종합상사 매각은 7개월이 걸렸다. 반면 이번 현대건설 매각은 2개월 내에 이 절차를 끝내버리겠다는 것이다.
초고속 매각 절차가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현대건설 주주협의회 대표 기관인 외환은행의 대주주가 론스타라는 점이다. 론스타는 2003년 8월 외환은행 인수를 위한 본계약을 체결했다. 론스타는 펀드를 구성하여 외환은행 인수를 추진했다. 대체로 론스타와 같은 펀드관리 회사가 기업 인수를 위해 구성하게 되는 펀드는 그 존속 계약 기간이 대상에 따라 3~7년가량 되는데, 외환은행을 인수할 당시 론스타는 5년 만기 펀드를 활용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인수 후 이미 7년이 경과한 외환은행 펀드는 투자자와의 계약기간을 2년이나 넘긴 상태여서 신속한 매각과 펀드 해산 필요성이 절박한 상황이다.
론스타는 이미 국민은행·HSBC와 두 차례 외환은행 매각 협상을 벌였으나, 매각 가격 불일치와 금감원의 승인 거부로 실패한 경험을 안고 있다. 현재 론스타는 호주뉴질랜드은행(ANZ은행)과 매각 협상을 벌이고 있는데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만큼 매각을 간절히 원하고 있고, 이를 위해 금감원의 승인이 절실히 필요한 처지다.
<DIV align=right>ⓒ뉴시스</DIV>현대건설 사장과 현대차 부사장이 참석했던 지난 7월3일 윤진식 후보 선거사무소 개소식. |
이런 상황에서 외환은행 내 현대건설 M&A를 담당하고 있는 책임자는 전중규 부행장이다. 문제는 그가 오래전부터 현대건설 인수 의향을 밝혀온 현대그룹을 향해 올해 봄부터 치명적인 재무적 압박을 가하는 선봉에 섰다는 점이다. 공교롭게도 5월17일 한국정책금융공사 유재한 사장이 “현대건설 매각 절차를 시작하겠다”라고 공표하던 날 외환은행은 현대그룹을 구조조정 대상에 올리고 재무구조 개선약정을 체결하겠다고 언론에 흘렸다. 한마디로 정부와 채권은행단이 2005년부터 현대건설 인수를 공언해온 유력 후보자 현대그룹을 재무약정이라는 ‘족쇄’로 묶어놓은 채 “이제부터 현대건설 매각 절차를 진행한다”라고 공표한 꼴이다. 외환은행 전중규 부행장은 현대그룹을 대상으로 재무구조 개선약정 체결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현대그룹이 약정 체결을 거부하자 채권자협의회를 동원해 신규 여신 중단, 기존 여신 회수라는 초강수를 두었다. 외환은행이 채권은행협의회를 통해 재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기업을 상대로 만기 여신 회수를 결의한 것은 1980년 국제그룹 강제 해체 이후 유례를 찾기 힘든 초강수였다는 것이 시장의 평가다.
윤진식 전 청와대 정책실장, 무슨 역할 했나
이후 현 정권 들어 현대차 정몽구 회장은 각종 현장을 이 대통령과 나란히 순방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과시하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MB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현대차 해외공장 방문, 당진 현대제철 준공식 참석 등 현대차그룹에 유난히 애정을 보이는 것은 서울시장 재직 시 사옥 증축 문제 등 여러 인연을 겪으면서 MK와 가까워졌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현대건설 인수전에 현대차그룹이 갑자기 뛰어든 배경도 그런 특수 관계에서 비롯된 보은 심리가 작용하는 것 아니겠느냐는 지적이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두 사람 사이의 끈끈한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는 이 대통령의 외아들 시형씨가 최근 입사해 근무하는 자동차 부품회사 (주)다스와 현대차그룹의 특별한 거래 관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현대차그룹에 연간 2000억원 안팎의 자동차 부품을 공급하는 다스는 현재 MB 친인척이 총집결해 있는 회사다.
현대건설 인수전에 뛰어든 현대차그룹과 청와대의 특별한 관계를 놓고 볼 때 대통령 주변에서는 윤진식 한나라당 의원(전 대통령실 정책실장)의 역할과 행적이 주목된다. 그는 일단 금융기관에 대한 금감원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고, 평소 현대건설 김중경 사장과도 친분이 있는 관계다. 현대자동차 정의선 부회장을 포함해 세 사람은 고등학교와 대학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
현대차그룹과 윤진식 의원의 긴밀한 관계는 현대건설 매각을 둘러싼 그의 역할에 대한 의혹으로 이어진다. 더구나 윤 의원은 현대건설 인수 과정에서 현대차그룹과 경쟁하게 될 거의 유일한 대상인 현대그룹의 재무구조 개선약정 체결 여부를 결정하는 시점에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명목상 금감원은 주채권은행의 재무구조 평가에 개입하지 않도록 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깊이 관여하고 금융기관을 지휘한다. 또 대부분 청와대 비서실 등 정책 라인과 협의한다”라고 말했다. 이로 미뤄보면 외환은행이 현대그룹을 상대로 초강수적 재무 압박을 가하던 지난 4월 윤진식 당시 정책실장이 모종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위치로 보인다. 그러나 윤 의원 측은 이에 대해 “경제수석으로서 재계 총수들을 만나기는 했지만, 현대건설 매각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기에 시장의 그런 이야기에 일일이 대꾸할 가치를 못 느낀다”라고 말했다.
지난 5월 말까지 청와대에서 근무한 윤진식 전 정책실장은 7월28일 충북 충주 재·보궐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했다. 윤 의원은 6월24일, 법정 선거운동이 시작되기도 전에 “자동차 배터리팩을 생산하는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 HL그린파워를 충주에 유치하기로 현대자동차그룹 측과 합의했다”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당시 예비 후보였던 윤진식 의원은 “최근 현대자동차그룹 측과 충분한 협의를 마쳤으며, 부지 확보 추진과 함께 공장 등록에 필요한 절차를 곧 밟게 될 것이다”라고 기자회견을 통해 공언하기도 했다. 이어 7월3일 충주에서 열린 그의 선거사무소 개소식에는 김중경 현대건설 사장과 김진석 현대차그룹 부사장이 나란히 참석했다. 윤진식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현대차그룹과 합의한 자동차 부품공장 유치에 대해 현대차그룹에 문의한 결과 “그런 보도가 나가는 것이 곤혹스럽다. 확인해주기 어렵다”라고 답했다.
윤진식 의원 외에 청와대에서 정진석 정무수석도 현대차그룹과 인맥으로 연결돼 있는 경우다. 정 정무수석의 사촌형이 현대차그룹 정진행 기획조정실 부사장인데 현재 현대건설 인수전의 실무 총괄을 맡고 있다. 그는 현대건설 인수를 성사시키기 위해 대정부 창구 구실을 하고 있다.
바로 이 같은 관계와 사정 때문에 시장에서는 현대건설 인수전에 대해 형식적 경쟁을 거칠 뿐 ‘이미 현대차그룹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짜여진 판이나 다름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현대건설은 사실상 국민 세금으로 정상화된 국민 기업이라는 점에서 정권 입맛에 따라 밀실 야합으로 인수자를 정해놓고 공개경쟁 입찰 형식을 빌리려 한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청와대와 당사자들은 이런 의혹을 부인하지만 그간 정부와 채권은행단이 보여온 무리한 행태와 초고속 매각 추진 강행은 시장의 의구심을 불식시키지 못할 뿐이다. 만일 이 같은 공정성 시비가 해소되지 않은 채 11월까지 서둘러 매각 작업이 이뤄진다면 현대건설 매각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퇴임 후 또 다른 아킬레스건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