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새해가 열리는 것과 함께 전라도 고부군에서 전 봉준의 지휘아래 동학 농민군이 봉기한 것이다 탐욕과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마침내 무기를 들고 일어선 것이었다. 동학군의 기세는 순식간에 전라도지방 전역으로 확산되고 4월 28일에는 전주성까지 함락 하기에 이른다. 무능하고 부패한 척족 세력들은 놀란 나머지 원세개에 달려가서 청나라군대를 불러다가 동학군을 토벌해 달라고 애원한다. 당시 척족세도의 우두머리로서 대표적 탐관오리로 지탄 받던 민영준이 원세개 공관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청국군대를 불러 들이는데 앞장을 섰다.
이 민영준이 뒤에 이름을 민영휘로 바꾼 자이며 한일합방 때 자작의 작위를 받고 일제시대 조선의 제일의 부호라는 소리를 듣던 인물이다. 그리고 일제시대에 자신의 이름자를 따서 세운 학교가 휘문교이다.
청나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1500명의 병력을 아산만에 상륙시켰다. 당시 일본과 청국관계로 보아 어느 한 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면 상대방도 군대를 보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양국군대가 조선땅에서 충돌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 이었다. 그런데도 왕실과 척족정권은 우선 발등의 불을 끄자는 심산으로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인 것이다.
청국군대의 출동과 동시에 일본도 인천에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켰다. 일본정부는 조선이 청국에 파병 요청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청국과 한 판 붙을 각오로 혼성여단 규모의 대병력을 파견하기로 즉각 결정했다. 갑신정변 당시 원세개의 쫓겨난 수모를 갚고자 지난 10년간 군비를 확장 하면서 기회를 노려오던 일본이었다. 이제 스스로 찾아온 호기를 그대로 지나칠 그들이 아니었다. 이때쯤 조선의 관군은 동학군으로부터 전주성을 탈환 했으며 청일 양군의 출동 소식을 듣고 동학군의 활동도 어느 정도 소강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그들은 동학란이 진정 되고 있으니 철수해 달라는 조선정부와 양국군대를 동시 철수하자는 청국제안 을 모두 거부하고 새로운 문제를 들고 나왔다. 즉 동학란이 일어난것은 조선이 내정이 부패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내정 개혁 없이는 또 다시 내란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일본군은 내란의 근본이 되고 있는 조선의 내정개혁을 하지 않고는 철수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조선 주재 일본공사는 청국이 조선에 출병하면서 그들의 "속방"을 보호하기 위해서 라고 했는데 조일 수호조약 제 1조는 조선이 자주 독립국가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 하고 있다. 따라서 "속방"이라는 표현은 조일 수호조약을 부인하고 모독하는 것이다. 조선정부는 청국의 "속방"주장을 인정하는지 여부를 밝히라고 요구한 것이다. 일본공사 오도리의 이런 질문앞에 조선 정부는 그야말로 답변할 길이 막혔다.
인정한다고 하면 당장 일본이 윽박지를 것이고 부인하면 청국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 정부는 원세개의 사전승인 아래 속방 여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피한 채 "자주와 평등 운운한 조일 수호조약을 준수 할 것이다"라고 답변함으로써 일단 곤경은 넘겼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외세에 의지해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자주성 없는 정권의 고단한 입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정권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탐관오리들과 친일 매국노 세력들이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어가고 있는데... 그리고 청국을 불러들인 민영휘의 자손들이 여전히 그 더러운 친일 재산으로 현대판 가렴주구를 일삼으며 서민들의 고혈을 쥐어짜고 있으니... 민영휘가 친일 매국노인 것은 알았으니 그 원흉이란 것을 이제사 알게 된 나의 무심함이 원망스럽다! 나는 가가이로는 민영휘의 졸개들과 싸울 것이며, 멀리론 친일 매국노들과 싸울 것이다! 덤벼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