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봄날은 간다를 보았던 것은 대학교 2학년 때. 음악과 배경과 배우들의 대사가 좋았고 사랑의 아픔, 이별의 슬픔 따위에 잠겨 있었던 21살의 나에게 매우 적당한 영화였다. 여러 번 영화를 보면서 기필코 은수네 집에 가보겠다고 다짐을 했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어머 어느 덧 십년이 되었다. 여전히 봄날은 간다는 나에게 최고의 사랑영화다. 남녀가 사랑을 시작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두 사람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결국 한 사람이 먼저 떠나버리고, 남은 사람은 어찌할 줄 모르는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 나는 은수의 마음도, 상우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난 다음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는 은수의 마음이 더 이해가 되었다. 나 역시도 상우같은 남자와 금새 사랑에 빠졌겠지만 아마 단순함과 지루함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상상 속의 사랑은 언제나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견고한 그 무엇이지만 현실 속의 사랑은 화려하고 재밌고 멋진 것. 순간의 화려함과 반짝임에 끌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여자들의 성향도 다양해서 모든 여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고, 분명 특별히 조용하고 까다롭지 않은 여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그 과는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은수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이미 이혼도 한 번 했고 남자한테, 연애에게 기대할 것도 별다를게 없는 상황. 아닌 척 하지만 사실은 더 좋은 것, 더 재밌는 것, 나를 장악할 수 있는 남자를 찾고 있었을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되며 강릉 은수네 집이 참 마음에 들었었다. 혼자 살기 좋은 크기의 집, 집에서 바다가 보이는 점, 은수와 상우가 사랑을 나누는 공간. 헤드가 없는 침대. 상우의 넓은 어깨에 은수가 꼭 안겨 잘때면 나까지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 같았다. 실제로 바다와 아파트가 함께 있는 동네라니 이 곳에서 꼭 한 번 가보고 싶었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강릉, 특히 은수네 집은 멀었다. 아직 장거리 운전은 잘 하지 못하기에 남자친구가 태워주는 차를 타고 가고 싶었으나 잘 성사되지 않았다. 마음이 괴로웠던 7월 초, Y에게 연락을 했다. 강릉 가자고. 마치 상우가 회식 끝나고 은수에게 가기 위해 택시를 타며 외쳤던 "아저씨 강릉!"처럼. Y는 흔쾌히 가겠다고 했다. 고마웠다. 집에 있기 너무 괴로웠었다. 원망, 분노와 같은 좋지 않은 감정들이 올라와서 어디라도 나가서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