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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현장의 숨결은 그 어디에- 정해박해의 진원지를 찾아서


BY dongsil112 2007-05-22

 역사 현장의 숨결은 그 어디에.......
 
<정해박해의 진원지를 찾아서>
 
 2007년은 정해년으로  한국 카톨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성지중 하나인 곡성성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정해박해의 진원지인 곡성성당은 180년만에 세번째  돌아온 정해년을 맞아 5월 9일부터 5월 12일까지 정해주간으로 선포했다.
개회식을 시작으로 음악제, 학술제 ,무용제 ,나눔잔치 등 다채로운 행사를 개최했다. 
 

 
천주교 박해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분이 다산 정약용선생의 가족이다.
1801의 신유박해 이후 비교적 대규모의 박해는 없었으나 전국 각지에서 국부적인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1815년 을해박해를 피해 온 신앙인들이 곡성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옹기촌을 형성해 신앙의 보금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그도 잠시 잠깐  1827년 전라 남도 곡성 덕실마을의 한 옹기점에서 일어난 사소한 다툼이 그만 교난으로 확대되니 이것이 정해박해이다. 
곡성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더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었고 피신하는 신자를 따라 탄압의 손길이 퍼져나가 급기야는 순창 용담 임실 장성 전주 등 전라도 전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전라도의 모든 옥은 이때 잡힌 교우들로 초만원을 이루게 되는 데 전주에만도 240여 명이 넘었다고 전한다.
 
 
 

 
정해박해는 여느 박해와는 달리 그 기간이 짧았으면서도 탄압의 정돈는 매우 심했다고 한다.
 두 달간 맹렬하게 계속된 박해는 전라도 지역에서는 교우들이 집단 생활을 전폐하고 심산 유곡으로 피신해 생명을 겨우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당시 전라 감사 이광문이 추위와 굶주림에 약한 인간의 나약성을 매우 교묘하게 이용해 붙잡힌 교우들의 많은 수를 배교케했다.
전라도, 경상도, 서울, 충청도 등지에서 2월~ 5월의 넉달 동안에 500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체포되었고 15명만이 옥사 또는 처형당해 순교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배교하고 석방되어 마침내 정해박해가 종식되었다.
 

 
신앙의 자유가 생기면서 광주 교구는 순교의 현장인 이곳에 본당을 설립키로 결정하고 1950년경 당시 옥 터였던 자리에 대지를 마련하고 곡성성당을 세웠다.
얼마 전에 리모델링 된 본당 건물안에 들어서니 화사한 꽃들의 향기와 밝은 조명등으로 현대화된 성당의 모습에 한껏 매료된다.
 

 
사진은 곡성성당 마당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상이다.
김대건 신부는 1984년 한국 교회 창설 200주년을 계기로 방한한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다른 한국 순교자 102명와 함께 시성됨으로써 성인위에 올랐다.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애국선열동상건립위원회'에 의해 1972년 절두산 성당광장에 최초로 건립되었다.
 

 
나눔장터에서는 풍성한 먹거리를 선보였는 데 그 중에 무공해 채소로 담근 김치가 가장 많은 인기를 누렸다.
 

 
잡채가 또한 별미로 아이들의 입맛을 돋군다.
후라이팬을 뒤적이면서 잡채요리를 마무리 하는 아줌마의 정성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역사의 현장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드물지만 그 숨결만은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고동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