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나의 실수
그날은 날씨가 제법 좋았다. 물론 여름 한철 더위를 어찌 하랴. 그만하면 태풍 부는 것도 아니겠다 우산없이 비 맞고 서있는 것도 아니겠다 남편이 바래다 주는대로 고맙기 한량없지. 전날 밤에 시어머님께서 아침 일찍 서둘러야할꺼면 아이들을 봐주시겠다고 하셨지만 그냥 미안한 마음에 사양했다. 어차피 출발 시간이 여유로우니 그정도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지척에 시어머님이 계셔서 언제든 며느리가 바쁠땐 아이들을 부담없이 맡끼곤 했다. 할머니와 보내는 시간도 소중한 시간이려니와 그러고나면 내가 하고싶은 일을 여유롭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아이 넷 키우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역시 시어른이 거기 계시니 의지하고 살 밖에. 아쉬운 쪽에선 늘 고마운 맘을 갖게 된다.
이른 아침 남편은 상경채비를 자꾸 물어왔다. 그냥 9시 발 열차를 타서 익산에서 한번 환승하면 된다고 한다. 어차피 회의가 한창 진행될때서야 도착할건 자명한 일이니 그리 서두를것없이 여행삼아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오리라. 한두번 열차를 타본것도 아니고 물론 일년에 한두번 타볼까말까하는 처지로선 가족들을 놔두고 멀리 어딘가로 다녀온다는 자체만으로 들뜨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주부들 결혼해서 아이들 낳고 살면서 어디 홀홀단신으로 여행 한 번 제대로 다녀본적 있던가. 며칠 전 실은 가냐 안가냐 문제를 놓고 우린 부부는 심각하게 의견충돌이 없지 않은바다. 공교롭게도 우리부부는 늘 출타해야할 일이 겹칠 때가 많다. 그럴 때면 어느 한쪽은 반드시 양보를 해야만 한다. 대부분 여자 쪽에서 양보를 해야 뒷끝이 없는 편이다. 그렇더라도 이번 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애들도 이제 어느정도 컷겠다 남편 일이야 우리가족의 경제를 책임진다곤 하지만 출장이 잦은 편이고 늘 그 중요성을 강조하곤 한다. 이세상에 중요하지 않은 일이 어디있던가. 매순간 순간이 단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기회이지 않는가. 남편의 일을 이해 하면서도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고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질투도 난다. 마침 나도 이번 기회에 따로 남겨준 여름휴가도 못 찾아먹을 바엔 일단 핑게 삼아라도 상경해보자는 맘이 앞섰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쪽이 양보하니 그새 가정의 평화는 다시 찾아온다. 남편이 결정을 내렸다며 봉투를 건네준다. 봉투안에는 여행경비가 들어있다. '야호' 이거 쾌재를 불러야 겠다. 갑자기 남편이 믿음직스럽게 보이기 시작한다. 전후사정을 들어보고 신중히 결정한 사항에 대해선 가타부타 하지 않는 성격이라 우선 다행인 생각이 든게 사실이다.
남편출장은 오후에 출발해서 승용차로 두시간 거리의 거창에 가서 하룻밤 자고 온다. 다섯 살 쌍둥이는 어린이집에서 5시까지 있다가 시어머님이 데리고 있으면 될터. 초등학생인 딸둘은 비록 교회신자는 아니지만 교회에서 하는 물놀이캠프니 안심하고 보낸다. 하니 오늘은 그야말로 홀홀 단신. 오후 시간 내내 부담없이 다녀오리라. 맑고 밝은 햇살을 받으며 아침8시 50분 곡성역 도착하니 출발 기차가 9시 17분이란다. 더 어이없는건 여름 성수기때에는 증편을 하기때문에 두어차례 앞에 열차가 있었다는 것이다. 미리 열차 시간을 정확하게 알아봤더라면 회의에 늦지 않고 참석할수도 있었으련만 일단은 나의 치밀하지 못한 단점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뭐든지 남편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기회를 번번이 놓치는 꼴이 된셈이다. 남편이 끊어준 왕복열차표를 받아들고 역사 안으로 들어선다.
(곡성역 뒤에 곡성의 진산인 동악산이 보인다.)
파아란 하늘에 흰구름이 동악산 아래도 넓게 드리워져 있다.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초록빛 들판에 무럭무럭 벼가 자라고 있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아래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곡성 읍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한 쪽은 지리산 끝자락에 고달면이 남원읍과 연결되어 있다. 길쭉한 철도길따라 이어진 들판. 저 들판너머엔 섬진강이 압록에서 갈라지며 한쪽은 구례로 흐르고 또 한쪽은 보성으로 흐른다. 내가 사는 고장을 한 발 멀찍이서 들여다보게 되는 여유마저 생긴다. 뿌뿌 소리가 길게 이어지며 기차가 덜커덩 선다. 문이 닫히고 좌석을 확인하는 사이 안내원이 검표 하잔다. 승무원의 검표를 받은 난 변경된 열차시간표에 대해서 몇가지 물어보았다. 열차시간표는 보통 성수기때인 6월경부터 8월 광복절즈음까지 1년에 딱 한차례정도는 바뀐다는 것이다. 5월에 상경한 이후로 오늘 처음 탔으니 그동안의 정보에 까막눈인건 어쩔수 없다. 승무원은 "열차시간을 잘 확인하세요." 하고 거듭 말한다.
(승무원 양은희씨가 전철표를 확인하고 있다.)
열차 안에서 예전에 인기를 누렸던 TV드라마'가을동화'가 한창이다. 아이 넷 딸린 삼십대 주부가 이시간에 한가롭게 열차칸에서 드라마에 푹 빠져 있는 모습 상상해보라. 좀 과장을 더하면 세상을 다 얻은 것 처럼 여유롭잖은가. 어느새 익산역에 도착했다. 곡성역에서 익산역까진 약 1시간이 소요된다. 여기서 40분을 더 기다린 후에 KTX로 갈아타서 용산역에서 하차하면된다. 40분이면 초등학생수업시간으로 따지만 1시간수업시간이니 참으로 넉넉한 시간인셈이다. 대기실에서 잠시앉아있으려니 성경애단장이 문자를 보내왔다. "무슨 생각하면서 와요? 옆자리 괜잖은 분위기의 남성이 있나요? 잘와요." 다소 유머러스한 분위기의 메시지를 받으니 더 빨리 동료들이 보고싶어진다. 마음같아선 이미 도착해서 동료들을 만난듯 행복했다. 아줌마닷컴 기자단이 출범한 이래 몇 차례의 언론사의 취재가 있었다. 나 역시 한때 모 언론사의 모니터활동을 했던 경험을 토대로 용기내어 아줌마닷컴 기자단모집에 응시했고, 객원기자를 거쳐 정식기자가 된터. 기자라면 모름지기 언제 어디서든 취재거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는 상념이 뇌리를 스친다.
(익산역 대합실에 환승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기다리는 동안 화물열차도 구경하고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표정들을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다. 차도 한 잔 마시고 주전부리로 산 초콜렛도 그만이고 더이상 좋을수가 없을정도의 기분을 만킥하고 있는사이. 열차가 들어선다. 기자단활동를 하면서 카메라 셔터누르는 게 취미가 되버린지 오래다. 기차에 타는 승객들을 취재삼아 사진만 찍고 있었으니....... 어서 탑승하라고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이 거의 다 탔을 즈음 시계를 들여다본다. 이미 내가 환승해야할 열차는 문이 닫히고 있었다. 간발의 차로 기차는 경적을 울리며 쌩하고 멀리 달아나버린다. 멀어져가는 기차 꽁무니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탑승객들은 디카에 담느라고 놓쳐버린 KTX)
어처구니없다는 말이 이순간 문득 떠오른다. 어처구니하면 보통 맷돌의 손잡이를 뜻하기도 하지만 한자어의 의미 그대로 어디에다 몸을 둘지 모른다는 뜻의 "어처구니(於處軀尼) "로도 쓰인다. 생각 밖으로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물건이며, "어처구니없다"고 하면 "어이없다"와 함께 너무도 뜻밖인 일을 당하거나 해서는 안 될 커다란 일을 겪었을때 쓰인다. 원래는 궁전이나 지체 높은 집의 지붕위 처마 끝자락에 흙을 빚어 만든 익살스런 동물들의 조형물을 가리킨다. 어이없는 일을 당하고 보니 웃음이 먼저 나온다. 철도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니 조금더 기다리면 다음 열차를 승차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뒤돌아섰다. 그래. 이왕 회의 시간안에 도착할 수도 없을바에 이것으로 만족하리라. 30분전까지만해서 동료기자들에게 이따가 꼭 보자고 문자까지 날린마당에 좀 쑥스럽지만 할수 없지. 오늘의 여행은 여기까진가보다 여길밖에......
(곡성역으로 돌아오는 열차 안 풍경)
살다보면 계획한대로 안되는 일도 많다. 어쩌다 잡은 행운도 뜻하지 않개 놓치는 수가 있고 그러다보면 매 순간을 긴장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도 깨닫는다. 삶의 여유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짧은 한나절 기차여행으로 돌아오는 내내 일상의 탈출에 대해서 되새기게 된다. 열차를 타고 가는 승객들 저마다 갖은 사연을 안고 도착지를 향하여 달린다. 찻창너머의 풍경은 한 순간 스쳐 지나가지만 그 동화 속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미움과 사랑과 슬픔과 기쁨을 온 몸으로 부대끼며 살고 있을터. 여행은 꼭 여행다워야 할 필요가 있지않은가. 여행은 뜻하지 않게 얻은 기회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면 언제든 후회는 없을터. 실수로 인해 돌아오는 기차를 타는 이 순간이 내 일생에 몇번이겠느가?
( 달리는 열차에서 바라본 바깥 경치)
고동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