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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하던 날


BY dongsil112 2007-10-19

벌초하던 날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년 하고도 6개월이 지났다. 타향사람과 결혼해서 산지 오랜지라 고향길은 늘 설렘임과 어린시절의 추억을 더듬는 길이 되곤 한다. 맘만 먹으면 쉬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일단 비행기 타고 오면 짧은 여행기간 동안에 만날사람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다. 그중에 이번 고향방문은 시절이 시절인만큼 출가외인이 처음으로 선묘에 벌초를 갔다. 경상도에서 올라온 큰 오빠와 제주도에 남아 있는 작은 오빠. 그리고 어머니를 모시고 산소에 오니 기분이 새삼스럽다. 작은 오빠가 예초기를 다루고 나머지는 곡식 가꾸는 밭가운데까지 침입한 칡 뿌리를 담가로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여름동안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메어주고 다가오는 팔월 한가위을 맞이하기 앞서 조상에 대한 하나의 예를 갖추는 것이 벌초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묘와 나란히 있는 아버지의 묘는 당신이 돌아가시기 몇해 전에 가족묘로 손수 만든 묘역인 것이다. 당신이 돌아가실 날을 미리 아셨는 지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를 이장해 오고 밭담가에 정원수를 구해다 심고 후손들이 묘때문에 상처를 받지 않토록 배려를 하셨다. 아버지가 당신이 누울자리를 직접 고르시고 곱게 단장한 이 묘역이 오늘은 햇살이 한무더기로 쏟아져내린다.
 
 제주도에서 자란 난 한 번도 벌초를 가본 적이 없다. 벌초는 팔월한가위가 다가오면 친척들이 한데 모여서 조상묘에 대한 벌초 즉 "소분"을 한다. 남자들이 주로 참석하고 장손 장남이 집안 대표로 참석하는 경우가 많다. 여자인 난 그저 어머니를 도와 음식장만을 거들면 된다. 그러니 자연 벌초에 관한 관심이 줄 수 밖에...... 조상묘에 올릴 과일과 떡 등 음식을 적당히 장만하고 8월 절기 즉 백로즈음이면 자손들이 선묘를 찾아 벌초를 하러 다니는 데 집집마다 사뭇 친척들의 방문이 잦은 시기이다. 특히 제주도는 섬지방 특유의 관습이 있어 자식을 낳아도 섬 밖에는 좀처럼 내 보내지 않으려 했고, 반드시 후대를 이어 선묘의 기일세사와 벌초를 잊지 않도록 당부하기도 하였다. 살아 생전의 안락보다도 저승에 가서의 극락을 원했고 후손들에게 제사나 묘소의 돌봄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을 바랐던 게다. 자손들이 살아 있고 벌초를 하지 않는 것은 '죽은 아방곡두에 풀도 안 그치는 놈이라'고 해서 불효 중에도 제일 큰 불효로 친다. 벌초할 시기가 지나도 벌초를 안 한 산소가 있다면 그 묘는 그 후손이 다 끊어졌다고 해서 '골총'이라고 하고 이러한 골총은 산터가 좋지 않아서 후손이 態沮?것으로 여겼다. '추석 전이 벌초 안호민 너울썽 온다'는 말도 있으니 선묘에 벌초를 안 하면 그  조상이 잡초를 둘러쓴 채 명월 보러 온다는 것이다.
 
 벌초에 관련되 용어들이 몇가지 있다. 우선 무덤에 불조심하고 때맞춰 풀을 베어 돌보는 것을 '금화본초'라 한다. 줄여서 '금초'라 하여 풀이 자라는 것을 방제한다는 뜻이 있어 벌초와 비슷한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옛말에 '처삼촌 뫼에 벌초하듯'이라는 말이 있어 주마산산격으로 정성을 들이지 않고 건성으로 하는 걸 경계하기도 한다. '사초'라는 말도 있는데 사초는 잔디를 뜻한다. 묘의 봉분이 세월이 가면 비바람에 의해 점차 크기가 작아지거나 무너지게 마련인데, 봉분을 다시 높이거나 무너진 부분을 보수하여 잔디를 새로 입히는 일을 사초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시집 간 딸이 십년 만에 처음으로 선묘에 소분을 했다. 추석때마다 벌초니 성묘니 차례니 하지만 정작 먼 곳으로 출가해서 사는 딸로선 친정나들이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하물며 친정 벌초에 까지 참여하다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고동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