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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귀하게 컸는데


BY 키티 2000-09-09

고르고 고르다 그래도 이 남자면 마음 고생은 안하겠지 하며 나름대로의 콧대를 꺾고 27살 겨울에 나는 결혼이란 걸 했습니다. 시집 어른들은 시골에 사셔도 생각이 고루하지 않고 트이신 분들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명절을 맞고 보니 내생각이 많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었죠. 우리 시댁은 4대 제사를 4개의 상에 각각 다 차리고, 그러니까 수저는 모두 13, 술잔도 13, (할머님이 한분 더 계심)... 이런식이죠. 그러니 음식양이 엄청나죠. 한번은 아주버님께서 "다른 집에서는 한 상만 차리고 밥과 탕,수저만 바꾸더라" 하시니 우리 시어머니 일언지하에 순 상놈의 집이라고 흉을 보시더군요. 저희 친정은 그렇게 하는데... 그리고 종가집이라고 십몇촌 되는 친척들까지 다 인사드리러 옵니다. 저도 친척들이 정을 내는 건 좋습니다. 그런데 그 뒤치닥거리가 다 며느리 차지 아닙니까? 저는 친척들 얼굴 거의 모릅니다. 부엌에서 일 하느라 바쁜 며느리가 감히 한 상에 앉아 이야기라도 나누며 얼굴 익힐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제일 속상한 것은 일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것도 물론 힘들고 속상하지만 저보다도 준비하시는 시어머니께선 더 힘드실테고 당신께서도 계속 일 하시니까요. 여자로서 우리 시어머님도 시집와서 이날까지 고생 많이 하셨다는 거 아니까요. 그런데 밥 먹을때 같이 상에 앉아 못 먹고 부엌바닥에 쪼그리고 앉거나 구석에서 서서 대충 퍼먹을 땐 정말 비참합니다. 저는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친정에서도 귀하게 컸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아무 상관 없이 그냥 하녀, 그것도 옛날 반상구분이 엄격했던 시절의 종이 되어버립니다. 저는 정말 그것만은 개선하고 싶었습니다. 저도 제대로 반찬이 차려진 밥상에서 먹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 위로 나이 차이가 조금 나는 두 형님이 계신데 자신들은 그것이 더 편하다며 그러시니 막내인 내가 어떻게 건방지게 나서겠습니까? 두 분은 여유가 좀 있어 한숨 돌릴때도 부엌구석에 앉아 조용조용 이야기나 합니다. 시어머님에 대한 불만같은 것 말입니다. 결혼 7년째, 이제는 자존심이고 뭐고 없는 종의 생활에 조용히 적응하고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친정어머니가 이걸 아신다면......많이 슬프실까요? 우리 두 아이는 이런 엄마를 보면서 여자는 저래도 되는거라고 생각하게 될까봐 제일 걱정입니다. 우리 신랑만 해도 그렇게 커왔으니 내가 좀 뭐라고 하면 '어머니, 형수님들은 다 그렇게 잘하는데'라는 소릴 곧잘 합니다. 나만 일 잘 못하는 여자 되는 거죠.
이제 곧 추석인데 저는 종살이 하러 또 가야겠습니다.
이번엔 추석 앞으로 연휴가 붙어서 더 큰일입니다. 우리 시부모님께선 토요일 퇴근하자마자 바로 오길 바라실 겁니다. 그래야 콩나물 두시루 다듬고 송편도 몇말 만들지 않겠습니까? 다 우리 주실려고 많이 한답니다. 명절에 저는 나물에 대충 비빈 밥이 3박 4일 계속이니 더 먹고 싶지 않던데 말입니다. 송편은 소리만 들어도 질리고요. 거기다가 우리 어머님 막내를 이뻐하셔서(?) "느그는 마 하루 더 있다 가지"하실때는 정말 쓰러져버리고 싶습니다.
명절이 힘드신 주부님들! 이런 여자도 살고 있다는 걸 알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