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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부부싸움 승전기.


BY erding 2000-12-07

누가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을까요? Honey, 신혼이 꿀이라고.
다섯 달 후면 은혼식을 맞는 우리는 25년의 결혼 생활을 통틀어 신혼 초에 제일 많이 싸웠답니다. 자주, 많이, 심하게.
누가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웃겠지만요, 결혼 전까지 독방을 쓰다가 술먹고 담배피우는 남자와 한 방을 쓰게되니까 너무 짜증나더라구요. 다방에서는 담배피는 모습이 멋있어보일 때도 있었는데… 연애할 때는 같이 술집에 따라가서 같이 앉아있어도 싫지 않았는데…
좁은 방에서 술먹은 사람과 함께 자고 담배 피는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이 정말 불편하더군요.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 문제같아요.
이건 딴 걱정거리 없는 팔자좋은 푸념이구요.
의견충돌이 가장 많은 때가 신혼이었어요. 오랜 연애끝에 결혼을 했는데도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별별 문제가 다 생기고 서로 의견이 다르더라고요.
동갑이라서 그런지 절대로 내게 안 지려고, 나를 꼭 이기려고 하더군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요.
시어머님은 성격이 아주 강하셔서(독하셔서라고 쓸까…) 시아버님께 큰 소리치면서 사셨고, 그이 양어머니가 계신데 그 분도 남편에게 절대로 안 지고 큰 소리치는 분이시고, 우리 손 위 시누이도 남편보다 목소리가 훨씬 더 크거든요. 늘 남자들을 측은하게 바라보던 내 남편의 총각 때부터의 결심(?)은 "나는 절대로 마누라한테 지지않을 거다" 였고, 그의 꿈도 "나는 절대로 나를 이기려고 덤비는 여자랑 결혼 안한다" 였답니다. 이해가 가시죠?
내가 그 꿈과 결심에 걸린 여자랍니다 … (상상 해보세요)

그래도 사랑하는 마음은 세상 어느 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기 때문에 몇 년을 잘 지냈지요. 가끔 싸우면서.
아이 셋을 낳은 후 어느 날, 그날도 별 일 아닌 하찮은 일로 싸우게 됐어요.
이게 중요해요. 별 일 아닌 하찮은 일!
좀 심각한 일은 금방 안 싸우잖아요, 서로 심사숙고하고 자제도 하고 그러는데 작은 일은, 이까짓 것을 가지고 저이가 왜 저러나 하면서 서로 짜증내게 되지요.
그날, 드디어 나는 최후의 승부를 거두었습니다. 개선했지요.
"아니, 자기 나한테 무슨 열등의식이 있는 거야? 왜 꼭 나를 이기려고 바득바득 덤비고 그래? 자기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야? 자기가 나보다 학벌도 더 좋고, 공부도 더 잘 했고, 사회생활도 성공했고, 자기 말대로라면 늘 양반 집안이라고 입에 달고 다니면서, 자기가 나보다 부족한 게 뭐래? 다 나보다 낫잖아. 모든 게 다 나보다 월등히 나은데 뭐때매 그렇게 나를 찍어누르고 이기고 내 위에 서려고 안달을 하는 거야? 나보다 못 한게 하나도 없는데.
자기 그런 사람이야?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이기려고 싸우는?
나는 그래도 자기가 자기보다 잘난 사람하고 싸워서 이기려고 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 자기보다 못난 사람한테 이기려고 애쓰고, 남자가 돼갖고 그래 여자한테나 이기려고 애쓰고. 정말 실망이야. 실망. 나는 자기가 너그럽게 다 감싸주는 인품이 있는 줄 알고 그렇게 믿고 있었어….."
나 자신도 놀랐다고요. 흥분하면 청산유수가 되는 건 딴 사람들도 아마 다 그렇겠죠? 속사포처럼 퍼부어댔는데 그래도 어떻게 다 줏어들었는지 내 말뜻을 이해는 한 모양이더라고요.
어쨌든 내 남편은, 자기가 마누라 말처럼 여자에게나 이기려들고, 마누라나 잡으려드는 못난 남자 취급받는 것이 너무너무 자존심 상해서 씩씩 거리더니 "잘못했다고" 싹싹 빌더군요. 자신은 관용있고 대범한 남자라는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용감하게 빌더라구요.
"못난 놈, 여자한테 빌긴 뭐하러 빌어?" 이런 생각은 하나도 안 들더군요.
"용기란 역시 이런 거야! 아, 관대한 남자야. 훌륭하다 훌륭해!"
돈 한 푼도 안 드는 칭찬을 한참 날렸죠.
그 뒤로, 또 싸울 기미만 보이면 내가 먼저 잽싸게 선수를 칩니다.
"또, 또, 나를 누르려고? 아휴 째째해 쫌스럽다!"
그걸로 끝입니다. 더 진전은 없어요.

(꼬투리 잘 잡는 페미니스트들이 이 얘길 들으면, 내가 남자를 '남자답게'로 부추겼다고, 여자 스스로가 남녀 차별의 생각을 한다고 비난할 지도… …)

이젠, 결혼 25년, 힐끗 쳐다보면 뭔 뜻인지 척하고 알아채리고, 아예 반격의 여지없이 초반에 강하게 꽉 잡든지, 아니면 슬쩍 피해주든지, 그렇게 됐답니다. 불꽃튕길 에너지가 없네요. 서글프죠?
모두들, 싸우는 것에 전 생애를 다 걸지 마세요. 싸우는 것 보다 훨씬 재미있는 일이 더 많거든요. 그러니 싸울 땐 슬쩍 넘어가도 크게 손해날 일이 없는 게 인생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