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891

며느리란..........


BY queen21k 2001-02-24

결혼 1년반만에 임신을 했다. 시댁에선 (내심) 결혼초부터 무척 아이

를 바라고 있었던지라 난 6개월이 지나면서부터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

다. 결혼한뒤로 생리주기가 10일 정도씩 불규칙했기 때문에 배란일만

조정하면 곧 생길거라 믿었었다. 그런데.. 생기지 않았다...종합병원

으로 옮겨서 주사와 약으로 배란유도를 시작했다. 정확한 시간까지 알

알려줬지만 2번 다 실패했다. 이러는 사이 다시 10개월 정도가 지나갔

고 그동안 내 머리속은 온통 임신에 관한 것 뿐이었다. 6개월이 지나

면서부터 시집에서 노골적으로 아이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었다. 시누

이는 물론 작은엄마까지 시부모의 근심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 얘기했

고 급기야는 집안의 유일한 걱정거리라는 둥, 인공수정을 해보지 않겠

냐는둥 하는 얘기까지 들었다..정말 가슴이 답답하고 미칠것만 같았

다.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 걸 어쩌란 말인지..그리고 인공수정은 하

기 싫었다..결혼 1년만에 인공수정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정말

로...그즈음 불임 검사를 받아보기 위해 다시 병원을 옮겼다.검사받으

면서 결혼한걸 처음으로 뼈저리게 후회했다..남자는 정액검사만으로

끝나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았다..다시는 돌이키고 싶지않은 순간이었

다...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는 내게 마치 큰 인심이라도 쓰듯이 취

미생활이라도 하면서 잊고 지내라는 말이나 하구.. 참 웃기는 얘기

지..

인공수정하자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사람들이 너무 신경써

도 않생기는 법이니 여가생활하면서 잊고 지내라니..정작 당신 아들이

나,오빠,조카 앞에서는 암말도 못하면서 나와 단둘이만 있으면 아이

를 읊어대는 시집식구들에 넌더리가 나기 시작했다.내가 무슨 씨받이

도 아니구..하여간 검사와 더불어 배란일을 다시 맞추기 시작했고 난

아무이상이 없다고 나왔다. 남편이 재검사를 받는 와중에 드디어 임신

이 되었다.병원을 옮긴지 3개월만이었다. 그리고 임신확인받던날 남편

의 결과가 나왔다.치료가 필요하다구, 자연임신이 어렵다구 했다.우리

는 좀 놀라긴 했지만, 어쨌거나 임신이 됐으므로 크게 신경쓰지 않았

다. 시댁에선 당연히 기뻐했다. 그리고 한달뒤, 정확히 임신 7주째의

일요일 저녁 난 병원에 실려갔다...배가 너무 아팠다..나중엔 가슴부

위와 척추부위가 끊어질것처럼 아팠다.고통을 호소했지만 의사(인턴이

었던것같다)는 초음파만 열심히 볼뿐 내 호소를 무시했고 급기야 난

기절하고 말았다.그제서야 심각성을 느낀 병원에서는 내가 산부인과

쪽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으므로 맹장이 의심스럽지만, 자기네는 산부

인과 전문이기 때문에 맹장수술을 할수 있는 타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

며 종합병원을 수배하기 시작했고 몇차례 거절을 당한 뒤에야 겨우 병

원을 구해 옮길수 있었다.그리고 다시 시작된 지겨운 검사들..그사이

난 혈압이 60까지 떨어지고 호흡곤란이 오는등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

고, 결국은 원인파악을 하지 못한채 일단 수술실로 향했다..고 한다.

난 사실 별로 기억나는게 없다.너무나 아파서 차라리 죽고싶다는 생각

을 했다는 것이외에는...그렇게 수술실로 향한게 아프기 시작한지 5시

간만이었다..

원인..? 우습게도 자궁외임신이었단다..내장기관쪽으로 피가 찼지 하

혈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다니던 병원에서는 몰랐던것 같다(쓰벌넘

들..명색이 산부인과로 울 나라에서 최고로 유명하다는 넘들이..맹장

이라니..하!)..결국 다음날 새벽 아기와 함께 나팔관 한쪽을 떼어냈

다.. 다시 며칠뒤 자궁안에 남아있는 아기집을 긁어내는 소파수술을

받은뒤 퇴원했다.

견디기 힘들었다..몸도 몸이지만 유산을 했다는 상실감을 견디기 어려

웠다.게다가 내 안위보다는 유산에 대해 더 가슴아파하는 시집식구들

의 모습이..상처였다..내게는..유산 그자체보다 더욱 큰...우울증 증

세까지 왔다.남편이 시댁에 전화했다.충격이 심해 당분간 조용히 쉬

게 두었으면 한다..전화하는것도 받는것도 별로 좋지 않을것같다..동

의했다고 한다..그리고 난 정말로 쉬었다..남편이 많이 위로가 되어주

었다..고맙게도..설이 됐지만 가지 않았다(우리는 서울에 시댁은 지방

에 산다).친척들 만나는게 끔찍했다.그렇게 다시 3주 정도가 지난뒤

시댁에 전화를 했다.시어머니와 내 사이가 너무 않좋아지는 것 같으

니 이제 전화해보는게 좋겠다는 남편의 염려를 무시할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전화한 내게 들려온 가시돗친 시어머니의 말을 잊을수

가 없다.죄송하다고, 맘이 너무 않좋아 전화드릴수가 없었다고 하는

내게 던진 첫마디는 "다 니가 욕심이 많아 그런 일이 생긴거다 욕심

을 버려라..아무리 니가 몸이 않좋아도 그렇지 며느리가 돼가지구 새

해 첫날 문안전화도 않하고..일 그만둔지 얼마 않돼 적적한 시아버지

한테 안부전화 한통않하구..보름날 잘 보냈느냐는 문안전화라도 했

냐..난 괜찮지만 시아버지를 않챙기는게 말이돼냐..너 데려올때 딴건

암것도 않보고 형제자매 많아 맘이 너그러울줄 알고 데려왔는데, 이번

일 겪고 보니 전혀 그렇지 않더라, 너한테 실망이 크다..집에가서 며

느리의 도리가 뭔지 배워와라..니가 그리 성격이 꽁하니 집안 사람 전

체가 맘이 불편한거다..너하나 참고 희생하면 온 집안이 편안한데 넌

왜그리 못하냐...며느리란 그저 참고 희생해야 하는 거다..너보다 더

한 사람도 많다..전에 문안전화를 너무 않한다고 얘기했는데도 넌 고

치지 않더라 그래서 이제 너한테 바라는것도없다..우리 서로 이렇게

맘 비우고 편하게 살자.."등등..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다..그래서 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며느리이

므로 죽다 살아났어도 할 도리는 다 했어야 하는건데 게을리한 내가

나쁜년이지..근데..난..참..싫다..며느리라는게..아마도 난 며느리가

아닌 사람이고 싶은가보다..그리고 억울했다..발칙하게도..이번 한달

반정도만 소흘히 했을 뿐이지 그동안 열심히 노력봉사했건만..이젠 바

가지도 긁지 않으려구 한다.입에 담는것조차 싫기때문에..다들 남편하

고의 사이가 제일 중요한거라고 충고한다.그래서 최소한의 할도리만

하고, 남편하고나 즐겁게 살자고 맘먹었다.그렇게 사는데까지 살아보

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