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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귀처럼 익숙한 성차별


BY 김**(양심선언하 2001-07-10

방귀를 뀌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성희롱 및 성차별은 우리네 일상생활에서 방귀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아니면 방귀처럼 자연스럽고 익숙한 것이어서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직장이나 사회에서 생기는 차별만 차별이 아니다.
채용이나 승진, 직장상사의 성희롱만 차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아주 불쾌한 차별을 받았다.
아들이라는 기대가 어긋나 이마를 찡그린 어머니를 보면서 딸들은 불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겠지만
결코 잊어선 안될 것이 바로 출생 당시부터의 차별이다.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
그것은 딸임을, 여자임을 경멸하는 눈빛이었다.

자라면서 우리는 또 차별을 받았다. 아들보다 적은 교육기회를 받게 된다.대학을 졸업한 여성의 취직은 물론 남성보다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하지만 좋은 대학을 나온 여성이라하더라도 그보다 못한 대학의 남성에게 자리를 뺏기게 된다. 그것이 현실이다.
직장에서 일어나는 성희롱은 고소해서 벌금이나 보상금이라도 받을 수 있지만,
가정에서 일어나는 성차별은 보상조차 받기 힘들다.
어린 여동생을 구타하는 오빠를 고소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아내에게 폭언및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즉각 경찰에 신고하는 것 역시 최근에야 경찰이 오게 되었지, 그전엔 집안일이라 하여 오지도 않았다.
가정에서 남편에게 사랑받고 보호받고 사는 걸 자랑하는 여성, 역시 그것도 성차별의 한 형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여왕처럼 떠받들고 보호해주는 남편은 애당초 아내를 인격체로 보기보다는 자기보다 열등한 존재로 생각해서 그렇게 해주는 것이다. 즉 그것도 여성을 지배하기 위한 한 방법일 뿐이다.
남자는 힘이 강하다. 물론 남자하고 붙으면 여자는 진다. 체력이 딸리므로...그래서 남자들은 아예 여자를 데리고 놀 뿐,상대하지 않는 것이다. 여자는 예로부터 소인, 약자, 노예, 꽃, 성적 대상물 ,인형, 애완용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여자와 대화는 할지언정 토론은 하지 않는데 그것은 여자를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내의 의견을 항상 진지하게 물어보며 합의에 의해 가정사를 이끌어가는 민주가정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도 바로 그런 탓이다.
물론 교육의 대중화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많이 생겨서 이제 어디서나 자연스레 남녀가 토론하는 걸 볼 수 있지만 4,50대 가정을 보면 대부분 남편의 독단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 가정에서 보고 자란 자녀가 남녀평등이나 민주적, 합리적 의사 결정을 습관화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엄연한 성차별이다. 나라살림의 절반은 여성이 하는데 아내의 의견을 무시한다는 것은 성차별에 해당된다. 젊은 남자가운데서도 은근히 아직도 독재적이고 권위적 요소를 청산하지 못한 남자들이 많은데, 배웠다는 고학력계층 가정내에서도 이런 성차별이 매우 심각한 상태다.
여성의 경제활동이 늘고 사회참여가 늘었다지만 중요한 요직은 남자들이 다 점거하고, 여성은 저임금, 보조직 정도에 머물면서 더이상 진출이 되지 않는 사회의 벽에 부딪치게 되고, 결국 가정에 들어가지만
가정이야말로 여성의 능력을 그저 단순 가사노동에 길들여서 바보를 만드는 요람이다. 물론 대학원 진학, 유학 등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지만 그것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특권층에 한해서이다. 가정주부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가사나 육아에 도움되는 요리,제빵, 피부관리,영어회화 등에 불과하다. 어느 문화센터나 여성회관에도 정치학이나 사회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여성들이 똑똑해져서 자기네 하는 일을 비판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정책상 자기네에게 좋은 것들만 시키는 것이다. 건강강좌나 댄스, 서예, 그림 등이 남성의 취향에 의해 개설된 것이다.
교직이나 방송, 문화예술계통에 진출한 여자들은 많아도 여성정치인의 수가 적은 것만 보아도 정책이 얼마나 편파적인지를 알 수 있다. 정책결정에 있어 여성의 힘이 이렇게 적으니, 우리네 가정의 민주화나 여성의 복지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사회가 여성복지를 책임지지 않으니, 여성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높은 남성과 결혼해 부와 성취를 누리는 것만이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해 각종 성형술, 화장술 미용술이 발달하게 된다. 그돈을 다 여성복지에 쓴다면 우리나라는 행복한 여성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러면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여성의 가정은 다 행복할까? 그들은 남아도는 시간을 여성인력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유한마담계층이 되어 버리거나 잘해야 취미나 문화생활에 몰두하거나 쇼핑중독자, 과소비 주역이 되어 계층간 위화감을 조성하게 된다.
예로부터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고정시켜 여성이 가사, 살림에만 전담하도록 만든 것만 보아도 남성의 음모를 알 수 있다. 가사 분담이 많이 이뤄졌다고는 하나 아직 남자들이 조금 도와주면서 생색을 내는 수준이다.
그들은 여성이 살림을 좋아하고 원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이 하기 싫은 일을 여성에게 떠맡긴 것일 뿐이다. 여성은 힘이 없어 부당한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영원한 가사노동의 부담을 떠맡게 되었다.
기계의 발달과 파출부의 고용으로 가사시간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나 식기세척기나 걸레세척기를 가진 가정은 그렇지 않은 가정보다 적다고 본다. 맞벌이 가정의 경우, 아직도 여자들이 두가지 일을 동시에 잘해내야 한다는 부담을 갖게 된다. 남자는 직장일만 하는데 비해
여자는 가사일까지 떠맡게 된다. 젊은 남자의 경우 아직 습관이 안되어 가사에 서툴다보니 새내기주부가 시키지 않게 되고 여성의 부담은 커지는 것이다.
전업주부의 경우는 가사노동의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게 된다.물론 살림하다보면 아기자기한 재미가 붙기도 한다. 육아며, 집꾸미기, 문화센터에서 가르치는 일들이나 그밖의 재산증식이나 미용, 요리, 부부간의 성생활 등 가정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요소는 꽤 많다. 하지만 그런 생활을 결혼후부터 할머니가 될 때까지 하라면 너무 길고 지루한 느낌이 든다. 세상에 태어나 할 일이 그것 밖에 없겠는가?
하지만 사회진출의 길은 봉쇄되어 있다. 열려 있는 곳은 가벼운 일들, 아나운서나 엠씨, 리포터, 유치원, 초중고 선생, 그것도 아니면 백화점등 서비스업계나 보험계통에 종사하는 것 정도다.
학원 강사의 경우, 여자는 재수생 종합학원의 강사를 채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유명한 작가 이문열도 자기의 문하생으로 여자는 받지 않는다.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이 단지 여성의 체력이나 실력이 딸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마도 그들의 여성에 대한 인식 자체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대형종합학원에서는 여성이 마이크만 들고 가르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강사를 채용하지 않는 건 성차별에 해당된다.
이문열은 원래 여성을 전통적으로만 해석하는 작가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문제는 여성에게 더 많다.
같은 여성으로서 힘을 합쳐 이런 열악한 여성의 지위를 높이고자 노력해야 하는데----우리나라 여성개발지수는 세계 하위권이다. 상대적으로 어머니지수는 높다---자기보다 좀 낫다 싶으면 뒤에서 헐뜯고 따시키는 바람에 능력있는 여성은 사회에 공헌하지 못하고 물러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나라가 잘 될 리가 없다. 여자가 요직에 오르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능력이 뛰어난 여성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기보다는 그저 먼저 깎아내리기부터 먼저 하는 것이 바로 우매한 여성들의 실수다. 그 피해가 자기에게로 돌아가 사회발전의 장애가 되고, 전근대화된 성차별의 고통을 계속 감수해야 하는데도, 능력있는 여성을 지지하기보다는 먼저 흠부터 찾아내려고 한다.그것은 곧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번에 추미애 의원의 취중 폭언에 관한 아줌마들의 의견을 보면, 그녀에 대한 공격을 일삼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녀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왜 그런 발언을 했는지 깊이 이해하기에 앞서 단지 취중 욕설이라는 것만으로 욕들을 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짧은 생각인지쓴 웃음이 나왔다.
스웨덴이 여성복지국가가 된 것은 그녀들의 적극적인 투쟁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군대까지 지원하면서 남성들과 맞서 싸웠다. 우리도 꼭 군대를 가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 정도의 치열하고 처절한 고통이 있었기에 여성복지국가가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가정폭력과 윤락여성, 빈민여성문제, 중산층 여성의 자아정체성 찾기 문제, 고령여성의 취업문제등 여러 가지 면에서 여성복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여성문제를 담당하는 기관이 여성 절반의 수에 비해 너무 적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여성이 가정에 묻혀 지내다 보니, 정작 여성문제를 해결할 사람들이 없는 것이다. 가족이기주의에 빠져, 내 남편, 내 자식만 성공하면 된다는 생각에 자신의 문제는 뒷전이 되고보니, 결국 여성의 삶은 공허할 수 밖에 없고 자신의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된 것이다.
지금 여성부가 신설되고, 여성단체에서 호주제 폐지운동을 벌이는 등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안일한 여성들은 아직도 그것이 자기일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이다.
다른 여성의 문제는 곧 자신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모든 한국의 여성들은 그 사정이나 형편의 우열에 상관없이 정치적 영향력이 약하며, 경제적 지위도 남성에 비해 낮다. 그러니 오래전에 판치던 남존여비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아무리 초현대식 건물에 편리한 사이버문명이 들어서고 성차별이 줄어들었지만, 가정폭력이나 직장내 성차별은 여전하며, 사이버상의 성폭력도 여전하다.
그 차별이 너무 많기 때문에
공기처럼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는 차마 그것을 느끼지도 못하고 문제삼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다.
간단한 성희롱을 문제삼아 고소해서 벌금을 받더라도
남자와 여자의 차별은
사란들의 관습, 제도, 법이 바뀌지 않는 한
여전히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정말 너무 무서운 일이다.
여성으로 태어남, 그 자체에서
차별이 일어난다는 것.
차이가 아니라 차별이 주어진다는 것.
그것은 여성을 슬프게 하는
가장 큰 범죄이다.
물론 여자보다 힘이 세고 영리한 남자들이
이 모든 제도나 관습, 법을 만들어 내었다.
그들은 여자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아서
여자보다 영리해졌을 뿐, 원래 영리했던 건 아니다.
단지 여자보다 힘이 세서 여자보다 먼저 주도권을 잡았을
뿐이다. 그리고는 계속 횡포를 부리며 지금까지 잡고
놓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치밀하고 교활한 계략은
이제 매너좋은 신사가 되어 여자를 공주처럼 떠받들어
행복하게 함으로써 여자들의 넋을 빼놓아
자기네의 주도권을 빼앗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영원히 자기네들의 지배하에 벗어나지 못하게...

그들의 계략에 의하면
여자는 영원한 피지배계층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