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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어머니가 되고 싶다


BY 꿈 2001-09-16

이제 추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이름하여 명절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는 글들이 많이 올라온다. 참 안타깝다.

나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지난 10년동안 어머님이랑 한집에 살면서

속도 많이 상했다. 물론 어머님도 속 많이 상했겠지만. 그러나 외관상

으로는 평온 그자체였다. 같이 살면서 큰소리한번 안냈으니 나나 어머

님이나 많이 참고 살았다. 성질이 괄괄하고 자기 중심적이어서 할말

다하고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어머님. 그 말에 상처 받아서 더 말조심

을 하게 되는 나. 어떤 일이든 딸이 최우선이고 그저 딸딸하던 어머

니. 아들키워봤자 소용없다고 당당하게 큰 소리치던 어머니. 지금도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 옛날 내 모습을 보는거 같아서 너무나 속

이 상한다. 큰아들과는 마음이 안맞어 못산다고 우리집에서 사셨다.

우리는 맞벌이다. 일종의 노후대책으로 우리아이들 봐주신거다. 물론

남들처럼 많은 돈은 안드렸다. 그러나 기본 용돈 20만원에 약값, 병원

비, 시어머니 친정대소사 부조 우리가 도맡아 했다. 그리고 어디 가실

일 있으면 경비 우리가 다 부담했다. 시숙네는 형편이 어려운 관계로

전혀 보조 없었다. 남들은, 특히 어머님과 가까운 분들은 모두들 이야

기한다. 어머님덕에 우리가 사는거라고. 겉으로는 예하지만 속으로는

아니올씨다. 참 속상한일 많았다.

작은애 낳아서 원인모를 병으로 죽어갈때 '난 신경안쓴다....'

첨으로 내집장만했을때(16평 아파트) 남들은 다 축하한다고 다음에 더

큰집으로 이사가면 된다고 축하해줄때 우리어머니 ? '내가 그집에 들

어가 살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콧구멍 만한집...' 동네방네 그따

위말하고 다녔다. 10원한푼 안보태줬으면 대견하다고 생각하는게 당

연하다고 생각한다. 수고했다는 말한마디라도 해주면 좀 좋았을까.

당신딸 거의 친정와 살다시피하는건 괜찮고 아들 처가간다면 노골적

으로 싫어하셨다. 처음에는. 몇년후 내가 그랬다. 어머님은 딸이랑

사위 친정오는거 싫냐고. 대답? 사위가면 반찬신경쓰인다고 하셨다.

명절때는 더욱 가관. 며느리 둘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데 당신 딸 안

온다고 당신 올케와 이러는거다. '딸은 키워봤자 소용없다. 명절이

되도 오지도 못한다고.' 화토치게 시댁에 전화해서 오라고 하신적도

있다. 신랑 그날 나한테 무지 당했다. 당신 며느리는 딸 아니냐부터

시작해서..... 음식만해도 그랬다. 식구는 없는데 그 많은 음식 다

하고 나면 딸줄거라고 더 하라고 했다. 정말 싫었다. 당신이 직접 해

주던가 아니면 다른때 해주던가, 하필 일에 질려있을 명절때 ...

명절은 노동절. 수고했단 말한마디 못들었다. 온갖 잔소리, 잘했네

못했네 품평까지 곁들이고... 확 돌아버리기 일보직전, 폭발하기 일

보직전까지 갔다, 언제나. 그래도 참았다. 말대답한번 안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미련하게 살았다. 시누는 그랬다. 마음속으로 넣어

두지 말고 할소리 하라고. 자기가 친정엄마 성질 아니 이해한다고.

그래도 못했다. 아니 안했다.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닌 이상 못할소리

하고나면 마음의 상처만 남기에. 딸의 말이 곧 법이고 당신말이 곧

법인 너무나 강한 시어머니였다. 삐치면 일주일씩 말도 안했다. 1년

에 몇번씩은 꼭 그렇게 보냈다. 한 10년을 그렇게 하고나니 옛말이

절로 생각났다. 청상과부에 외며느리 정말 힘들다고. 난 외며느리도

아니었는데 갈수록 사람을 힘들게 만들었다. 신랑한테 그런 소리까지

다했었다. 그래도 신랑이 그런 저런 소리를 다 들어주고 받아 줬기에

지금까지 조용하게 살수 있었는거 같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게 끝났

다. 너무나 건강하셨었는데 암으로 몇달전에 돌아가신거다. 지금도

황당하다. 돌아가신복은 남들에 비교해보면 타고나신거 같다. 암이어

서 기분은 나빴지만(당신이나, 자식들이나) 자식들이 함께하며 최선

을 다할 시간도 주셨고 본인도 아셨으니 주변정리할 시간도 있었고.

젊어서 혼자되신 분이라 성격이 강했다. 참 용하게도 잘 버티셨다.

병명을 알고나서도 태연하게 버티셨다. 너무나 감사하고 안타까웠었

다. 임종의 순간도 모두 함께 했다. 마지막으로 손주들도 다 보시

고. 함께 살면서 섭섭한것도 많았지만 미운정 고운정이란 말을 실감

했다. 너무나 많이 울었다. 상을 치르고도 거의 한달을 울던 그시간

만 되면 눈이 너무 많이 아팠을 정도로. 진심으로 바랬다. 좋은데

가셔서 편히 쉬시라고.

이제는 명절도 즐겁게 보낼것 같다.

나는 앞으로 이런 시어머니가 되고 싶다.

명절에 며느리 친정보내주는, 아들내외 싸웠을때 일단 며느리 편들

어 주는, 집안 식구들 모여서 며느리 힘들때 한번쯤은 외식하자고 나

서는, 가끔씩 며느리 보약 지어주는... 그런 내 마음을 당연이 아니

고, 그마음을 고마워할줄 아는 며느리를 맞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