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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포기하고 있는 제가 보입니다


BY 파김치 2001-09-18

요즘 들어 부쩍 우울합니다.
제 일을 갖고 있고 딸아이는 이제 네 살입니다.
직장일로 눈코뜰새 없이 바쁘고
딸아이는 열감기에 기침에 밤새 괴로워합니다.
저 역시 몸살에 기관지염까지 겹쳐
몸이 너무 아픕니다.
이렇게 아픈데도 아컴이 생각나서
제 맘을 정리해 봅니다.
왜 이렇게 사는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하루하루 챗바퀴 돌듯이 악착같이 살면 뭐하나요.

남편은 결혼전 제가 좋다고 온갖 난리를 다 피우더니
결혼 2년만에 딴여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저는 6년 결혼 생활동안 산후 조리 두 달 포함해서
딱 5개월 쉬어본 게 다입니다.
그것 쉴 때도 우리 시댁에선 내가 아기 낳고 집에 눌러 앉을까 봐
수선을 피우고 몹시도 절 정신적으로 괴롭혔습니다.

제가 한푼 두푼 모으느라 뼈빠지게 일하고 있는 동안
남편은 그 여자와 여행을 가고 메일을 수도 없이 교환하고
데이트를 하고 250만원 짜리 보석세트를 선물하고..
피가 거꾸로 ??구치는 순간이 정말 한 두번이 아니었죠.
오빠 오빠하는 그 여자의 당돌한 목소리를
신랑의 음성 메세지에서 들었을 땐 .. 말로 못합니다.

그 여자와는 어떻게 된건지 모르겠고
그저 그 때 일을 잊으려고 애쓰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솔직한 본심에는 우리 결혼 생활의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동안 저의 일과는 남편의 메일 확인 , 각종 비밀 번호 추적,
음성 확인, 카드 명세 확인, 통화 내역 확인 등
흥신소를 방불케 하는 남편 추적 작업으로 시작되고
마감되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제가 스스로 추적 작업을 서서히
끝내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게 이제 내가 남편을 믿는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아니었나 봅니다.
너무 허무합니다.
남편을 포기하고 있는 제가 보입니다.
저이에 대한 애착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시댁에서도 뭐라뭐라 그래도
언젠가부터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런 소리에 무심해진 저를 발견했습니다.

이제 다 싫습니다.

겁도 안 납니다.

이게 다 뭡니까.

야무치고 상냥하던 저의 모습은 어디로 다 사라지고..

이게 다 뭡니까.

늘 잠이 부족하고 직장에선 아이 생각,
집에 오면 파김치..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결혼 6년 만에 처음으로 귀성열차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서울역 바닥에 돋자리 깔고 앉아서
표를 예매해 내던 또순이였는데 말입니다.
친정도 가기 싫고 시댁도 가기 싫습니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