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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기엔 너무나 멀쩡한 결혼생활을 앞에 두고.


BY 미치기일보직전 2001-10-29


.. 무슨 이유에서인지 매일 들릅니다. 전 남편이 바람을 피는 것도 아닌데.
굳이 바람이라는 단어를 붙이자면 제 남편은 '회사'와 바람이 난거겠죠.
너무도 당당하고 떳떳한 바람.
제가 힘들다고 말한다면 이거야말로 배부른 소리일까요...

호강에 겨워서(?) 요즘은 죽고싶다거나 집을 뛰쳐나가고 싶습니다.
머릿속으로가 아니라 가방을 싸두고, 베란다 난간에 올라서고, 그러다
아이들 얼굴에 그만두곤 하네요. 이런 행동 이해를 바래선 안되겠죠. 표면적으로야 너무도 그럴듯한 결혼생활인데.

남편과 저는 같은 회사를 다녔었고, 남편 선배의 소개로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연애할때 남편은 너무도 자상하고 세심했었죠. 대부분의 커플이 그렇겠지만 결혼하고나서 그의 태도는 많이 달라졌어요. 늦어도 집에 전화 한통없고(가끔 재미로 달력에 표시해보면 어떤때엔 석달에 한번 전화하네요. 제 남편 회사일이다 사람 만나는 일로 12시 넘기는게 다반사인데), 어쩌다 제가 전화하면 내용확인 안하고 '끊어' 한마디하고 끊어버립니다.(저 전화자주 안합니다. 이틀걸러 한번 할까말까... 왜냐고 물으면 회사일이 바빠서라고 합니다. 같은 회사 다녔습니다. 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릅니까??)

남편의 면죄부는 '이시기가 혹은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좋아질것이다'입니다. 이 말을 믿고 무작정 참고 기다리며 산게 8년이 지났네요. 그동안 저는 남편의 인생에 맞추어 다니던 대학원을 관두고, 회사를 관두고, 미혼모처럼 아이 키우고(남편이 유학 준비하느라 아이 얼굴 볼 시간도 없었죠.참 나무랄수 없는 이유죠. 그래서 더 답답하네요. 그럴듯한 이유이기때문에 제가 혼자 아이를 키우다시피 해도 된다는 주변의 인식이...) 자비로 유학을 갈 예정이어서 저 한달에 공과금, 아이분유값, 식비..... 모두 다합해서 50만원 이내로 살았습니다. 물론 너무도 기꺼이 그렇게 했습니다. 남편을 사랑했고 우리 가족이 잘 되는 방향이란 것에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즐거운 희생이라 생각했으니까요.

남편은 사회생활에 관한한 천부적입니다. 일 열심히 하고(일반적인 '열심'의 기준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잘 나가는(?) 선후배 챙기는 일에 목숨걸고, 자기개발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저는 뭐했냐구요? 제왕절개 수술날짜도 남편 스케쥴에 맞춰서 애낳고 혼자서 아이 둘 데리고 무지랭이처럼 살았습니다. 누가 저더러 그렇게 살라고 한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게 사랑이고 제가 할 도리라 생각했습니다.

한결같이 쭉 그렇게 살면 좋았을텐데 어느날부터인가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은 자기 인생에서 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20%미만일거라 얘기하네요. 그 20% 가운데 시집식구, 아이들 제외하고 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지... 선배 와이프의 은행 심부름은 기꺼이 하지만 우리집일로 은행에 가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답니다 이남자. 여행지에서 남의 식구들 나무젓가락 까서 쪼개서 챙겨주지만 호텔방으로 돌아오면 손하나 까딱 안합니다. 밖에서 하는 것도 피곤한데 식구들한테까지 그렇게 해야하냐고 반문합니다. 그에게 가정은 피곤한 나를 위한 휴식처이지 내가 신경써야할 대상은 아닌것 같아요. 그렇게 열심히 사회생활하고있으니 제법 그럴싸한 위치에 있는건 당연하겠죠. 그런 남편을 이렇게 씹고있는 저라는 여자는 나쁜년이구요.

각방 쓴지 5년쯤 되어갑니다. 물론 신혼때도 부부생활 뜸했습니다. 항상 생각할게 많고 사회생활로 바빠서 성욕도 별로 없다고 하네요. 석달에 한번 생각나면 무대뽀로 시작해서 5분 이내에 끝냅니다. 대화로 풀어라, 솔직하게 얘기해라... 다 해봤습니다. 이남자 저더러 정숙하지 못하답니다. 그런 욕구에 대해 얘기한다고. 신혼때 귓속말을 했더니 저더러 다신 그러지 마랍니다. '우리 엄마가 귀에 습기차면 병난댔어' 이러면서... 여름에 휴가지에서 등판에 햇볕으로 화상을 입었길래 알로에로션을 발라주려했더니 자기몸에 손대지 말랍니다. 이거 어떻게 해석해야되는지... 자신감도 없고, 가끔 제가 여자가 아닌거 같습니다. 이러다 다시 처녀되는거 아닌지 원.

사랑없는 결혼생활에 지칩니다. 아마도 저는 우리집에 있는 북박이장쯤 되나봅니다. 최근에 초등학교 동창(남자)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동문찾기 싸이트에서 절 발견하고 수소문해서 전화까지 했답니다. 그 친구가 제 이름을 부르는데 낯설었습니다. 제가 아닌거 같았습니다. 남편은 저를 '야' 이렇게 부릅니다. 더 늦기전에, 제가 완전히 증발해버리기 전에 무슨 결단을 내려야 하는건 아닌지... 내가 바람을 폈어? 아님 도박으로 집을 날렸어? 너 어디 나가서 찾아봐. 나만한 사람 만날 수 있는지 볼테니까... 이런 소리하고 있는 남편. 맞습니다. 지금 나가면 남편만한 사람 못만납니다. 당연합니다. 남편과 연애할 때의 난 똑똑하고 예쁘고 자신감넘치고 괜한 컴플렉스 같은 건 전혀없는 발랄한 아가씨(좀 역겹겠지만 그러려니하고 들어주세요. 이를테면 그랬단 얘기니까...)였지만 지금 제가 보고있는 이 아줌마는 도대체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라곤 약에 쓸려도 없는거 같고, 가능성들은 다 남편스케쥴따라 포기하고, 애 둘 딸린 똥배만 남산만한 그런 여자인데....

배부른 소리였습니다. 모범생 증후군인지 부모님 실망할까봐, 시어른들 대노할까봐, 아이들 보기에 나쁜 엄마일까봐, 주위의 기대에 어긋날까봐 그냥 참고 삽니다. 오점을 남기고 싶지않아서 무슨 죽을병에 걸려 빨리 이 생활을 끝내고 싶은 마음뿐인거 보면, 제가 무지하게 나쁜년인거 같습니다. 따끔한 질타에 정신을 차릴까 하여 몇자 적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