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해야겠다 4
아버지는 고질적인 노름질에 툭하면 바람을 피웠다. 어떤 바람은 한 열흘씩 아버지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기도 했다. 언니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던 그 해 겨울에도 아버지는 꽤 긴 바람을 피워대고 있었다. 눈 오던 어떤 날 밤에 아버지는 제 발이 저렸던지 사과 한 상자와 장미 한 송이, 그리고 새빨갛고 예쁜 아동 겨울코트를 사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 장미 한 송이와 겨울 코트는 언니의 생일 선물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언니가 자라서 판검사가 되어줄 거라고 굳게 믿는 것 같았다.
언니는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신동이라고 소문이 날 정도로 공부를 잘 했다. 두 해 뒤에 나도 학교에 입학했지만 나는 언니에 댈 것이 못되었다. 어디 언니한테만 처졌던가. 나는 아직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아래 동생보다도 더하기 빼기를 더 못했다. 못했다기보다는 동생이 나보다 계산을 빨리 했던 것 같다. 언니는 나에게 더하기와 빼기를 가르치면서 바로 아래동생을 나란히 앉혀 놓았다. 언니의 돌발 질문에 그 동생은 언제나 나보다 한 발 앞서 정답을 토해냈다. 그럴 때면 언니는 대놓고 동생보다 더 못났다고 나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래서였을까. 언제부턴가 내 마음 한구석에 ‘나는 언니는 물론이고 동생보다도 못난 아이’라는 의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 같다.
엄마는 그게 누구든 ‘나보다는 더 잘난, 적어도 부모로부터 나보다는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차지하는’ 동생들을 자꾸만 낳았다. 아들을 낳아야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던 엄마에게 내 입장 따위가 무슨 상관이 있었겠는가. 그렇게 세상에 혜성처럼 등장한 동생들 중에는 타고난 예쁜 외모 때문에 누구에게든 호감을 주는 동생이 하나 있었다. 그 애는 성질 또한 확실히 부릴 줄 알았기에 겨우 다섯 살 생일에 동네 또래들을 집으로 초대해 엄마로 하여금 계란 카스테라와 환타를 곁들인 파티를 열게 했고, 파티가 끝난 후 두 시간을 울어대더니, 결국 걸어서 한 시간이 넘는 시장에 있었던 양품점까지 언니가 걸어가서 깜찍한 색동 한복을 즉시 공수해 오도록 했다.
글쎄, 그 시절 내 생일날 나는 어떤 ‘특별 대우’를 받았던가... 나는 별이 일곱 개 그려진 사이다 한 병과 단팥빵 한 봉지가 그나마 내가 귀빠진 날 누릴 수 있었던 ‘기억할만한 생일특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첫째동생에게는 더하기와 빼기로, 둘째동생에게는 그 애가 겨우 다섯 살이었을 때부터 그 애가 가진 타고난 외모와 원하는 것을 강력히 요구하여 손에 넣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깡다구’에서 이미 댈 것이 못 되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인사였다.
학교에서 선생들은 나의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언니의 이름을 앞에 넣고 ‘~ 동생’이라고 불렀다. 동생들이 학교에 입학하고 언니가 졸업을 하자 그들은 나를 ‘~언니’라고 불렀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우리집이 타지역으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전학을 갈 때까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학교 선생들과 선후배들로부터 누구 동생, 또는 누구 언니라는 애매한 호칭으로 불리어지곤 했다.
그 시절, 나는 완전한 엑스트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