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권애라 선생
(1897.2.2~1973.9.26)
1897년 경기도 개성 출생
1919년 3월 1일, 어윤희 선생과 독립만세운동 주동
1919년 5월 30일 보안법 위반, 징역 6개월 선고
1920년 4월~5월, 여성의 애국사상 고취 강연 6회
1922년 소련 극동인민대표회의 한민족 여성 대표로 참가
1929년 중국 소주 경해여숙대학 공부
1942년 아들 김봉년 선생과 관동군 특무대에 피체,
1년 고문, 징역 12년형 언도
1945 광복을 맞아 장춘형무소에서 석방
경기도 개성(開城)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충교(忠橋) 예배당 내 유치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어윤희(漁允熙)와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은 그의 손에 독립선언문이 전해지며서 추진되었다.
그는 이 선언서 80여 매를 호수돈여자보통학교(好壽敦女子普通學校)에서 어윤희에게 넘겨주어 주요인사에게 배부하였고,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독립운동가와 찬송가를 부르며 만세시위는 시작되었다.
이 만세시위 행렬에 억눌렸던 일반민중도 호응하게 되자 일경이 동원되어 그를 비롯한 많은 주도인사들이 피체되었다.
5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6월형을 언도받았고 7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9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후에도 독립운동에 관련된 일에 힘써왔는데 1920년 4월 25일∼5월 27일 동안 6회에 걸쳐 수표교(水標橋) 예배당을 비롯하여 정동(貞洞) 예배당에서 ‘반도의 희망’, ‘잘 살읍시다. 등의 제목으로 한국여성의 애국사상 고취를 위한 강연을 몇차례에 걸쳐 시도했다.
같은해 7월 9일 종로(鐘路) 경찰서에 구금되었고 1922년 1월에는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極東人民代表會議) 한민족 여성 대표로 참가하여 당시 민족대표 여운형(呂運亨)·나용균(羅容均) 등과 함께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29년에는 중국 소주(蘇州) 경해여숙대학(景海女塾大學)에서 수학하면서 상해(上海)를 중심으로 여성지위 향상과 조국광복운동에 활약하였고 이후 동삼성(東三省)에서 지하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한다.
그리고 1942년 4월에는 길림성 시가둔(吉林省 施家屯) 영신농장(永新農場)에서 아들 김봉년(金峰年)과 함께 일제 관동군 특무대에 피체되어 1년 이상 비밀감옥에서 고문취조를 받은 다음 장춘고등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2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장춘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