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과 부마항쟁
대한민국 90년사에 획기적인 사건을 한번 정리하고 들어간다.
1919년 31운동(이 사건을 왜 운동이라 하는지 모르겠다.)
1919년 대한민국 건국
1945년 대왜승전
1946년 김성주의 난(亂) 혹은 북조선 단독정부수립-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
1948년 대한민국 정부 환국- 반쪽의 광복, 반쪽의 해방
1950년 경인공란(庚寅共亂) 혹은 김성주의 란(亂) 혹은 한국내란 일명625사변
1960년 4월혁명 혹은 419혁명
1961년 신축군란(辛丑軍亂) 혹은 박정희의 난(亂) 일명516혁명
1979년 영남시민혁명, 영남의 시민혁명 결과 박정희 죽음-일명부마사태
1979년 전두환의 란(亂) 혹은 기미군란(己未軍亂) 1212와 518을 거쳐 대통령이될 때 까지가 전두환의 난임
1987년 6월혁명
1980년 518은 1979년 전두환의 난의 연속된 과정이다. 그러나 1979년 부마항쟁이라 불리는 영남시민혁명은 박정희 독재를 종식시킨 일대 쾌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18은 민주화 운동으로 칭송하면서 영남시민혁명은 부마사태란 이름으로 평가절하 되고 있다. (민주화 운동이란 말도 이상타. 운동회에서 1등하면 민주靴라는 신발을 상으로 주는 줄 알겠다. 혈겁(血劫)이 좋은 표현같다. 광주 대혈겁)518로 무엇을 이루었나? 부마사태로는 박정희 정권을 종식시켰다.
518은 왜 일어났나?
1979년 대구 영남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자 경상남북도의 대학생들이 일제히 봉기했다. 이를 부마사태라고 한다더라. 무슨 부마라는 산에 사태라도 난줄 알았다.그 이후 우리나라는 민주화의 기대로 부풀었다. 그러나 전두환이라는 자가 독아(毒牙)를 갈고 있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계엄사 합수본부장이라는 권부의 수장으로 국민들 앞에 나타나자 전 국민은 반대했다. 광주만 그런게 아니었다.그런데 광주에서만 혈겁(血劫)이 일어났을까?
그건 아마도 광주시민들이 들은‘경상도 출신 공수대가 왔다.’ ‘여학생 유방을 도려내 죽였다.’ ‘여학생들을 발가벗겨 트럭에 싣고 갔다.’ 이런 소문 때문이 아닐까? 이런 흉악한 소식에 가만히 있다면 인간이 아니지, 부엌칼이라도 들고 나와 계엄군과 싸워야지. 그런데 다른 지역에 그런 소문이 돌았다는 말을 들어보질 못했다. 그게 이상치 않은가? 그러나 폭동이라든가, 북한인민군 참전설이라든가 하는 소리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518은 민주주의를 열망한 광주시민의 항거였으나 전두환독재정권등장의 빌미가 되었다는걸 부인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