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은 인생을
삭힐까(발효), 썩힐까(부패)
- 송필경 페북글
1.
오늘은 광복 78년을 맞는 날이다.
“과거의 ‘민주화 투사’들이 ‘반(反)대한민국’ 운동권 세계관을 바로 잡아야하겠다면서
<민주화운동 동지회>를 결성한다. ‘젊은 시절 벌였던 잔치판을 설거지해 다음 세대가 새 잔치를 벌일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조선일보 8월 8일자에서 인용.
그래서 발기인 대회를 오늘 열기로 했다고 한다.
2.
유신 시절에 대학 다닐 때 나는 이른바 ‘의식’이 어리버리했다.
출중한 의식으로 나에게 항일(抗日)의 숭고함을 뼈 속 깊이 새겨 준 치과대학 선배가 있었다.
선배는 지금 여당 도지사다.
얼마 전 이렇게 말했다.
“현 정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친일파가 되겠다.”
3.
“이해(利害)는 항용 변절(變節)을 요구하는 것이다. 절만 변하면 해를 면한다.
절만 잠깐 변하면 수가 난다 하는 것은 사람의, 더구나 지도자급인 인물의 일생에 매양 오는 유혹이다. 그래서 자칫하면 그 유혹에 넘어가 그의 공인적 생명은 영영 멸절하고 마는 것이다. 민중이란 이런 점에서 대단히 엄정한 재판관이다. 그리고 이 재판은 대역죄의 재판과 같이 일심(一審)이 곧 종심(終審)이다. 그 판결은 영원히 번복될 기회가 없는 것이다. 곤궁이나 생명의 위험은 결코 변절을 정당화하는 이유는 못되는 것이다.”
윗글은 이광수의 쓴 「조선 청년에 아뢰노라」의 일부다.
변절을 가혹하게 비판한 이 짧은 글에서 춘원 이광수의 천재다운 필적이 예리했다.
이광수는 1917년 장편소설 <무정>으로 전조선 여성의 연인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명성을 얻은 당대의 천재였다.
1919년 ‘3․1 독립선언’하기 바로 전에 도쿄에서 ‘2․8 독립선언문’을 썼다.
이광수는 민족주의자인 체 하다가 일제에 검거된 적이 있다.
이때의 이광수 모습은 문학이론가 김동석 선생의 ‘위선자의 문학’에서 잘 나타나 있다.
“민족주의자로서 일제의 공판정에 선 춘원이 눈물을 좔좔 흘리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말로 ‘와다꾸시와 텐노헤이카노(天皇陛下) 세끼시(赤子)데쓰’라고 하니까 일인(日人) 검사가 ‘이놈아, 네가 어찌 천황폐하의 적자냐, 노서아 사람 앞에선 공산주의자라고 하겠지. 이놈아, 너는 이때까지 민족주의자로 행세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지도한 청년들에 대한 책임으로 보더라도 어떻게 뻔뻔스럽게 천황폐하의 적자라고 하느냐.’고 호령호령하였다고 한다. 그랬더니 춘원은 더욱 많은 눈물을 흘리며 목소리를 더욱 간절하게 하여 ‘저는 천황페하의 적자’라는 것을, 몇 번이고 되풀이 하여 맹서하였다고 한다.
그때의 춘원을 당할 만한 연극배우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청년(당시 춘원에게 사숙하던 문학청년)의 감상이오, 그렇게 좋아하던 춘원에 대하여 환멸의 비애를 느꼈다고 한다.”
3.
도올의 생각이다.
“왜 우리는 지금 우리의 위대한 계몽주의 문학가 이광수를 정죄해야 하고
왜 그 위대한 시정을 우리민족에게 선사한 시인 서정주를 단죄해야 하는가?
아무리 그들의 문학이 위대하더라도 그들의 도덕성으로서는 우리민족의 앞길이 보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우리 삶의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을
확실히 역사에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의식이 우리 조선의 젊은이들에게는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다.”
4.
오늘 발기를 주도하는 자들은 ‘주대환’, ‘함운경’, ‘민경우’ 등이다. 과거 민주화 이력은 쟁쟁하다.
그래서 일까? 조선일보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대하며 칼라 지면을 할애했다.
보수 정권에서 한 자리를 떡 차지한 이재오, 김문수, 원희룡을 뒤따를 채비를 단단히 할 모양이다.
절(節)을 변(變)하는 변절은
삭음(숙성)일까 썩음(부패)일까.
순 내 멋대로 감각이다. 요즘 원희룡이 서울에서 풍기는 냄새 때문에 대구에서 코를 틀어막을 지경이다.
~극악무도한 민영휘의 척족인 여흥 민가놈이 안 끼는 자리가 없구먼!ㅠㅠ
이것들은 쥴리무당과 함께 반드시 천벌을 받고 말 것이다!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은 양극화,가치 전도,부조리,현대판 세습제로 이어지며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데...
세상이 어쩌자고 이리 썩어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