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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 태희 같이


BY 2009-10-18

[경향신문 63 창간특집]‘표정’을 도려내고 ‘미모’를 이식하는 성형공화국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ㆍ1부 똑같은 풍경-얼굴

거리에 탤런트 김태희가 넘쳐난다. 성형수술을 통해 김태희를 닮은 얼굴을 판박이처럼 찍어내는 탓이다. 작고 귀여운 눈, 복스러운 코, 네모난 턱 등 개성은 ‘죄’가 되고 크고 동그란 눈에 V라인 얼굴의 김태희 얼굴이 모범답안이 되는 대한민국이다. 복제인간이 되어야 안심하는 것이 오히려 공포가 아닐까.


해외유학을 마치고 올해부터 모 여자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이지연씨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수법 때문이 아니라 너무 비슷비슷하게 생긴 여학생들 때문에 매번 깜짝깜짝 놀라는 증세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아서다. 그는 ‘왜 전국에서 모인 여대생들이 한결같이 크고 동그란 눈에 오똑한 코, V라인 얼굴형에 머리모양과 화장법까지 비슷한가’ 처음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나중에야 대한민국 여대생들의 65%가 성형수술 경험이 있으며 남성들이 선호하는 긴 생머리에 올가을 유행인 스모키 화장을 해 쌍둥이처럼 비슷비슷해 보인다는 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강의실에서 똑같은 얼굴에 비슷한 옷을 입은 여대생들을 볼 때마다 약간의 공포를 느낀다.

개성을 가장 중요시해야 하는 연기자들도 마찬가지다. 주연과 조연을 불문하고 대부분 비슷한 외모여서 드라마나 영화에서 누가 누구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방송작가 박혜련씨는 “젊은 여배우들은 모두 성형수술로 제2의 김태희나 전지현을 만들어버렸고 중년층 이상의 연기자들은 보톡스, 주름제거술과 지방이식으로 팽팽한 얼굴을 가진 대신 표정을 잃어버려 진정한 연기를 보여주지 못한다”고 전한다. 박 작가는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는 미간의 골이나 웃을 때 보이는 눈가와 입가의 주름살을 모두 성형수술로 다림질하듯 지워 마네킹 같은 표정만 짓는 연기자들은 직무유기를 하는 셈”이라며 “외국배우들의 경우 사각턱, 매부리코 등을 개성으로 살려 다양한 인간상을 표출하는데 우리는 미모만 추구해 한심하다”고 꼬집었다.

이런 사례가 아니어도 대한민국이 성형공화국임을 각종 통계수치가 입증한다. 단발령시대에 “부모님이 물려주신 내 머리카락을 자르려면 차라리 내 목을 쳐라”고 외쳤던 한국인들이 이젠 성형수술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무식하거나(정보력이 없거나) 게으르거나 가난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세상이다. 쌍꺼풀 수술은 대학 입학 기념, 코 성형은 대학 졸업 기념, 주름살 제거는 이직 기념이다. 또한 어버이날 효도선물로 보톡스주사가 인기다. 2009년 2·4분기 기준 전국 성형외과 수는 729개(전문의 1242명)이고 성형시장 규모는 한 해 5조원에 이른다. 성형수술 환자의 50%가 여대생이라니 지난해만 딸 둔 부모가 2조5000억원을 성형수술비로 내놓은 셈이다. 이토록 많은 이들이 이렇게 엄청난 돈을 투자해 모든 열등감을 해소하고 각자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는 이 성형수술이 공장에서 인형을 만들 듯 비슷한 얼굴과 몸매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외모 꾸미기 미학과 페미니즘>이란 책을 펴낸 건국대 교양학부 연구교수인 김주현 박사는 성형공화국의 결과에 한탄한다.

“화장처럼 쉽게 시행되는 성형수술로 놀랍게도 전 국민이 미모의 평준화를 이룬다면 ‘마침내 외모의 민주주의를 이룩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위해 만세라도 불러야 하는가. 다양성, 풍부함, 역동성에서 시작된 미적 권리의 결과가 획일화라면 뭔가 이상하다. 이 사회의 진리이자 당위로서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외모 꾸미기는 어느새 대중의 자발적인 미적 권리의 발현이 아니라 강력한 미적 압력으로 변질되어 버린 듯하다….”

지난 9월 부산의 한 성형외과에서 성형수술을 받던 중 두 명이나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성형외과는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룬다. 5년 전에는 성형중독으로 고생하는 ‘선풍기 아줌마’의 섬뜩한 모습이 공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난 괜찮을 거야”란 생각을 가진 이들이 오늘도 생명을 담보로 수술대에 오른다. 그리고 예쁜 친구와 비슷한 얼굴이 만들어지면 만족해하며 병원을 떠난다. 왜 의대에서 최고 성적을 따야 가능한 성형외과 전문의들이 복제인간만 양산하고 있을까. ‘압구정 서울성형외과’ 이민구 원장은 “시대와 인종을 초월해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황금비율이란 미의 기준이 있는데 사람들이 자기 개성을 살리기보다 객관적으로 선호되는 모습을 원하고, 의사들이 고객들의 요구에 응해서 나타난 결과”라고 설명한다. 이번 가을 학기를 휴학하고 이 병원에서 턱뼈와 쌍꺼풀 수술을 받은 여대생 문모씨는 “어학연수나 자격증을 따는 데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보다 성형수술로 예뻐지는 것이 취업이나 결혼에 훨씬 유리한 것이 현실”이라며 “현대사회에서 가장 손쉽고 편안하게 신분상승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성형”이라고 얼굴을 붕대로 감은 채 단호히 말했다.

이렇게 10대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 성형수술 중독이 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하는 이들은 연예인이다. 성형마케팅이라는 신조어가 나올 만큼 연예인들은 각종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해 “난 어디 어디를 수술했다”고 자랑스럽게 밝혀 솔직함으로 호감도를 올린다. 성형수술로 비호감에서 호감형으로 바뀌어 더 많은 기회를 얻는 연예인들을 보며 대중들은 “나도 돈만 있으면 수술을 하거나 관리 받아 저 정도는 되겠다”는 욕망을 품게 되고 이를 행동에 옮긴다. 그리고 꾸준히 정보를 수집하고 성형수술과 고급화장품 등에 돈과 시간을 들여 죽어도 늙지 않고 배우 뺨치는 미모를 유지하는 이들은 ‘코스메틱 어퍼 클래스’로 대접받는다. 또 요즘은 대머리 아저씨나 주름진 얼굴의 아주머니를 발견하기 어렵다. 회사원 정진석씨(55)는 동창회에 갔다가 “넌 왜 팔자주름을 그대로 두냐” “절대 남 앞에서 내 친구라고 하지마라. 나도 할아버지 취급 받을라” 등의 수모를 당한 후 필러수술과 모발이식술을 받았다. 젊음을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들에게 경멸당하기 싫어서였단다.

지난해 베이징올림픽에서 장미란 선수가 금메달을 땄을 때 네티즌들은 환호하며 이런 글을 올렸다.

“세상이 말하는 가치관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외모에 목을 매는 대신 본인의 꿈과 목표를 향해 모든 초점을 맞추는 순수한 여자. 그리고 정말 목표를 이뤄 세계에서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선 여자. 외모를 뜯어고쳐 겉모습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여자는 발에 차이도록 많다. 하지만 목표를 갖고 자신을 희생해가며 최고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여자는 한 분야에서 단 한 명뿐이다.”

‘남자가 원하는 여자가 아니라 거울 앞에 섰을 때 자신의 본질과 내면에 가장 충실한 답변을 할 수 있는 여자’가 장미란 선수라고 남녀 모두 갈채를 보냈지만 남자들은 여전히 얼굴 예쁜 여자를 선택하고 덜 예쁜 여자들은 부지런히 성형외과를 찾는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장미, 백합, 채송화가 골고루 피는 세상이 아니라 성형외과 의사의 손길로 만들어진 조화로 가득한 섬뜩한 복제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