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망치는 ‘청문회 질문’ 금물 … 가까울수록 배려하고 예절 지켜야 추석이 안녕
이홍 소설가 ever1217hs@hanmail.net |
앵커 : 뉴스 속보입니다.
논란이 됐던 ‘추석해방 운동본부’의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 운동의 발단이 된 주부들은 고무장갑을 벗어던지고 ‘추석파업’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오고 있습니다. 한편 긴 연휴, 갑작스럽게 끼니 걱정을 하게 된 사람들이 식당 문을 닫지 못하도록 아우성입니다. 이 밖에도 명절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일제히 몰려나와 교통상황은 극심한 정체를 빚고 있습니다. 이번 시위 가담자들은 추석에 대한 아픈 사연을 가진 사람들로, ‘추석을 없애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나와 도로를 점거한 상태입니다. 광화문에 나가 있는 땡땡이 기자를 연결하겠습니다.
기자 : 지금 광화문 일대는 아비규환입니다. 추석을 맞아 이동하려던 차들이 시위대에 의해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경적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대고 있습니다. 귀경하는 차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그 수 또한 급격히 늘고 있습니다. 차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은 시위대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자, 시위 가담자 중 한 명과 인터뷰를 시도해보겠습니다.
음식이 어떻네 저떻네 절대 평가하지 말 것
“왜 시위에 가담하게 됐습니까?”
“제가 뭐 식기세척기랍니까. 하루 웬종일 서서 설거지만 하게요! 뭐, 그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누구는 하루 웬종일 딱딱 화투나 치고, 누구는 설거지나 해야 하는 추석이라면, 절대 사양이라 이거죠!”
이번 초유의 사태가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시위 가담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고,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정부는 이번 사태에 대한 신속한 해결점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광화문에서 땡땡이 기자였습니다.
앵커 : 이번 사태로 떡집을 비롯한 차례상 대행업체들이 특수를 누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떡집 앞에 줄을 선 남자들이 턱없이 모자란 송편 때문에 난동을 부리고 있으며, 차례상 대행업체 홈페이지는 접속 과열로 5시간째 다운된 상태라고 합니다. 정부 대변인의 말입니다.
정부 대변인 : 정부에서는 이번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점에 대해 전 국민께 진심으로 사죄드리는 바이며, 빠른 시간 안에 문제를 해결하고자 비상긴급대책회의를 소집했습니다. 한 시간 뒤에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발표되겠습니다.
추석을 코앞에 두고 ‘추석 대혼란’이 일었다? 걱정 붙들어 매시라. 어디까지나 가상일 뿐이니까. 허나, 이런 상황이 오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며칠 전 사촌동생과 전화통화를 했다.
“명절이 청문회야!”
“무슨 소리야?”
“이번 추석은 절대 불참이야. 명절 때만 되면 청문회에 끌려나간 기분이라니까. 교제한다던 남자와는 잘되어 가느냐, 결혼은 언제 할 거냐, 그렇게 세월아 네월아 하다가 똥값 된다…. 결혼 안 한 여자 앞에 붙을 만한 수식어가 정말 ‘똥’밖에 없는 거야? 허, 참나, 더러워서 못 참겠어. 그냥 어디 가까운 데라도 훌쩍 다녀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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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어린 말도 듣는 사람 따라 상처 될 수도
말고문 앞에서 당할 장사 없다. 나는 사촌동생에게 그래도 와, 라고 말하려다 입을 봉했다. 사촌동생의 고단한 심경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무작정 참석하라고 졸랐다 치자. 내 얼굴이라도 보려고 온 사촌동생이 쫀득쫀득하고 고소한 송편을 먹다가 목구멍에 켁 걸려서 혼비백산하는 상상을 하자 내키지 않았다. 어쩌다 대한민국의 최대 명절 추석이 누군가에게 비수를 꽂는 날이 됐을까.
조금만 배려하고 조심한다면 누구나 웃고 즐길 수 있는 추석도 분명 오리라. 뜻깊은 명절에 누군가의 미간에 내 천(川)자 생기게 만드는 말, 말, 말! 내친김에 추석을 망치는 ‘불행어 사전’을 들춰보자.
“전이 왜 이렇게 짜요?”
무거운 장바구니 들고 와서 정성스레 만든 음식을 갖고 짜네, 다네, 밍밍하네라고 평가하지 말자. 순간 허망해져서 그 수고를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시니까. 자나 깨나 “맛있어요”라고 하자.
“결혼은 언제 하니?”
혼기가 찬 조카를 걱정하는 마음은 접어두자.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사항이 된 지 오래인 걸 모르시나? 요즘 세련된 어르신들은 이런 말씀을 하신단다. “얘, 요즘 같은 시대에 결혼 같은 거 서두르지 마.”
“아이는 언제 가질 거니?”
결혼한 지 몇 년 된 부부에게 으레 던질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누군가 구석에서 눈물을 흘릴 수도 있는 노릇이다.
“밥은 해먹고 사니?”
야윈 조카의 얼굴을 보고 맞벌이를 하는 조카며느리에게 이렇게 물었다가는 필경 부부싸움으로 이어질 것이다. 대신 “맞벌이 부부들은 저녁을 교대로 한다더라”는 어떨까. 조금 과장했다고 나쁠 것은 없으니.
“그애, 어느 대학에 갈 수 있다니?”
조카의 진로가 걱정스러운 것은 인지상정. 하지만 수험생의 엄마만큼 그 문제에 예민한 사람도 없다. 조카의 앞날이 걱정되거든 차라리 “건강이 최고다”라고 말하자.
“이혼은 왜 했니?”
물론 궁금하겠지만 한 번만 참자. 이혼했다면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괜한 얘기 꺼내서 상대방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말자. 아, 이 얘기는 대안이 없다. 아예 꺼내지 말자.
인생은 정해진 프로그램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말들이 진심어린 관심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에 상처받는 사람이 분명 있다.
추석을 손꼽아 기다리며 가슴 설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의 한복은 부쩍 자란 키 때문에 어느새 짧아져 발목이 훤히 드러났다. 그런데도 좋다고, 진분홍 치맛자락 팔랑거리며 뛰어다니던 시절. 솔잎 가득 담긴 찜통에 넣고 푹 쪄서 참기름 살살 발라 나눠 먹던 송편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맛난 음식이었다.
지금처럼 알록달록 화려하지 않은 평범한 송편이 왜 그렇게 달디달았을까. 그리웠던 친척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먹는, 아름다운 시간의 맛이었을 것이다. 올해는 모두 고소한 송편 맛을 만끽할 수 있는 안녕한 추석이 되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