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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엇때문에 아이들을 가르치는가?


BY 2007-02-16

 

사교육이니, 공교욱이니 대안교육이니 교육의 내용과 제안이 달라지고 있다.

그러니까 몇 십년전부터 시행된 교욱목록이 변화되고 변천한다.

 

요즘은 한 학생이 기본적으로 몇 개의 학원을 다녀야 하는 시대다.

싫든 좋든 본인의 의견은 나중이다.

 

요즘 대학이 골치를 앓고 있다.

학생들 때문에.

 

그렇게 힘들게 대학을 입학했는데, 학생들의 기초학력을 교수가 교사가 되어서 다시 더하기 뺄셈을 가르치는 것이다.

논술이든 수학이든 영어이든 우리가 조기유학부터 조기교육까지 치뤄내는 이 세대가 도무지 아리송 한 거다. 선 수업 선 진도를 잘나가야 진학도 쉽다고 해서 비싼교육을 시켰는데. 교수는 정작 학문을 위한 것보다 전공과목을  가르치기가 더 힘들단다.

 

 알려줘도 감감 무소식처럼 눈만 껌벅 껌벅거리고, 본인의 과 적성에 아랑곳 하지 않고 무조건 입학부터 먼저 한 학생들은 이건 강건너 불구경식 수업이다.

 

 한 해 두해 겪은 문제가 아니다. 이제야 불거지는 것은 평준화로 인한 몇차례 겪은 교육과정의 결과가  대두 되고 있다. 문제는 대량생산에 치중한 나머지 정작 걸르고 골라야 하는  본인의 선택권리는 한 참 뒤처져 있으니 이제야 대학에서 논술이니 어려운 주문을 하는데. 그게 어째 얼른 답이 나오지 않는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수는 없다고 ,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한 말 그른 거 없다. 학생들은 이젠 다른 것을 요구한다. 그게 무엇인가?

 

 일방적으로 나이를 먹으면 당연히 초중고를 입학해야 한다는 방정식은 이젠 수리를 해야한다.

고장 난 기계가 부품을 교체하듯이 각각 개인의 성격과 인격이 다른데, 일렬로 줄서서 나란히 학교를 순서 정하고 똑같은 교육을 받아내야 하는 것은 감옥에 보내는 고문과 다름이 없다.

 

 특히 어린정서에 가장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이든 본인의 감정은 절대적이다. 이런 것을 아예 싹부터 잘라내고 거기에 덧 대는 지금의 교육은 차별을 유도하며 경쟁에 지치게 하는  지름길이다.

 

 지금의 배움은 누구나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인권의 권리를 지적하지만. 그 이전에 너는 무엇을 하고 싶니의 선택적인 권리는 아예 삭제를 하고 있다. 누구나 중엔 나의 개인 인격은 교묘하게 간과된다.. 즉 누구나의 포함에 못 들어서 안달나게 하는 대량생산으로 우르르 몰고 다니는 교육은 이젠 인기가 떨어 질 것이다.

 

 누구보다 일찍 영어단어에 수학문제를 알았다고 해서 끝에는 똑같은 상황을 만나는것은 아주 황당한 거다. 각각의 개성이 다르고 그로 인한 환경도 평준화와 전혀 다른 세계가 있슴에도 이런 부류는 아예 문제아처럼 제외 당하고 있다. 그 만큼 많은 피해사례들이 즐비하게 발생했다. 미국은 등교시간에 학생들 가방을 검열한다. 혹시 총을 들고 올까봐 공항처럼 삐삑 데는 탐지기를 설치하느라 돈도 무지 많이든다.

 하긴 학교에 공부하러 갔는데  난데없이 군인처럼 총 맞아죽은 학생들이 많다.

 

 이런 실제상황을 들여다보면 과연 학교는 무엇을 전제로 기르쳐야 하는지 전적으로 고려해야한다.

아이들을 경쟁사회에 몰아넣는 현재 추태를 고발한다. 일등부터 꼴등까지 분류를 하는 상품처럼 생산해서 나오는 인격은 없다.점수만 표시 된 성적표는 개인의 능력을 전부 알려주지 못한다.더군다나 숫자로 만 표현된 사람들의 성격을 믿을 만한가 의구심이 생긴다.

 

 우리가 이젠 쳐다보고 따져야 하는것은 과연 인생에 얼만큼 배울 수 있고, 가르칠 수 있으며, 누구의 잣대에 못 미치네 , 아니네의 관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다가오는 미래다. 이런 미래를 준비하자고 창의적인 두뇌를 이야기 하지만, 결국 돈을 얼마나 많이 벌 수 있는지, 남보다도 더 우월하게  반드시 지내야 하며, 상대에 대한 열등감만 조성한다. 빈부차별은 당연한 결과다.

 

 이런 미래는 우리가 살고 우리가 만나야 하는 세상이다. 차별은 만들면 생긴다. 그러나 차별을 넘어선 다양한 시선은 다양한 세계를 창조한다.아직도 우리들은 아는 사실보다 모르는 진실이 더욱 많다.

오죽했으면 모르는 게 약이라고 했겠는가?

그럼에도 아는만큼 보인다. 미래는 반드시 그렇다.

 

 문자를 모른다고 생각도 못한다고 단정을 짓듯이 빠른 요구를 습관처럼 하게 하는 현 교육은 절대 수정을 해야한다. 사교육도 대안교육도 공교육도 오로지 목적과 목표는 같아야 한다. 다양한 샛길은 라이벌이다. 한 강줄기에서 작은 샛강이 이뤄져 흐름이 자연 스럽다. 큰 강만 주인공이 아니라는 법이다.

물같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것이 대수다.

 

 왜 무엇때문에 아이들을 가르치고. 기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