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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해지는 법도 배워야 한다.


BY 2007-01-27

 

지금은 모두가 부자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말하지 않아도 너무 많은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서점에 가도 일년에 얼마씩 돈을 모으라 목표를 주는 책은

출판사가 걱정을 안해도 잘 팔린다.

펀드네 부동산이네 재테크네등 용어를 모르면 무식한 축에 끼인다.

나이 오십에 드는데도 아직 월세냐? 집도 없냐 등등 금긋는 가난의 경계는

확실하게 한다.

 

그렇다고 집은 여기저기 미분양되어 건설회사가 도산되어 망한 애기는 죽어도 언론은 모른다고 한다.

한 팔십만채가 아직 분양이 안되어 있지만 한 사람이 달팽이처럼 집을 이고 다닌다면 한 채도 아니고 몇 백채를 이고다니는 욕심꾸러기 달팽이들이 사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1%의 땅부자들을 잡겠다고 내 놓는 부동산 정책도 하품이 나올 정도 이지만

그 놈의 돈만 아니라면 그런 것 무겁게 세금내는라 애쓰라고 해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한 것은 부자가 많으면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야 하는데

애들은 집이 싫어 나가는 가출은 해가 가면 갈수록 늘어나고 그러면 한 쪽은 붙잡아 도로 가정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고 아우성이고.

 

가난을 탈출해야한다고 부르짖었던 새마을 운동으로 시발하여 우리도 자화자찬 할 만큼 많은 발전을 해왔다. 잘 나가건  못 나가건 산업혁명이 몇 백년동안 이루어졌 던 것이 우리들은 몇 십년만에 후다닥 해치운 거다. 빠른 속도에 빠른 성장에 다른 나라들도 배우러 온다는 곳이 대한민국인데.

 

 그런데 한가지 미처 빠뜨리고 버리고 온 것이 있다.

바로 반드시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열이고 백이고 주장을 하는데

왜 부자가 꼭 되어야 하나의 당위성과 명분은 홀랑 빠진 것이다.

앙꼬 없는 찐빵과 고무줄 없는 팬티마냥  맛없는 부자들과 천박한 웃음을 웃게 하는 부자들은 무진 장 많은데. 도무지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할 돈이 . 이젠 돈이 사람을 부리게 하는 형국이 된 것이다.

그러니 부자는 돈이지 . 결코 사람이 주체가 되어서 부리는 부자는 희귀한 천연기념물이 되었다.

 

거기에 교육은 어떤가? 더 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는다.

대학에 들어 올려면 등록금부터 먼저 내시오 이러지 우선 먼저 사람부터 들어 오시오 이러지 않는다.

사교육비가 얼마나 지급이 되어야만 일류대를 들어가냐 마냐인 요즘 풍토인데.

 

대출이라도 받아서 대학에 갖다 줘야 졸업장 주지 맨입으로 주냐? 식이다.

거기다가 학자금 대출이라고 무이자냐? 그것도 아니다. 국가는 학생들 상대로 고리업자를 나서서 해준단다.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취업하면 천천히 비싼이자로 갚으라고 홀린다. 이렇게 대출 받은 학생이 취업 못해서 신용불량자가 된 학생들이  약 삼십만이다. 학부모들 허리만 휠 뿐만 아니라 미래의 국민들이 처음부터 신용이 불량하게 출발 시키는 정책은 누가 주관하는 가  묻고 싶다.

 

모두들 많이 배워서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한 깃발 아래로 모이자는 군국주의 반  대충대충 식이  섞인 문화가  구렁이 담 넘어가는 은근 슬쩍 감추는 식의 교육은 이런 악성과 같은 종양은 쉼없이 자라는 것은 당연하다. 정상인 것은 절대 이런  환경에서 태어 날 수 없다.

 

종교에선 가난한 자에겐 적선을 베풀고 죄 지은 자들은 죄사함을 받고 구원 받으라는 진실을 늘상 외운다. 가난한자가 가장 낮은 자라고 혹간은 이야기 하지만 나는  아니라고 하고 싶다. 그 낮은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낮음은 반드시 상대성을 요구한다. 그 상대가 반드시 무엇보다 높고 고귀한 것을 지칭 할 때 반대로 그늘 진  긴 그림자가 반드시 있다. 여기에 포함되라는 말인데 그게 어디 내 마음데로 속하냐 마냐는 성격은 아닌 것이다. 착각이라면 엄청 큰 착각이고  이런 착각의 오류는 너무 많은 사실들을 왜곡하게 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가난이다. 바로 없는 것. 무엇이 적던 많던 반드시 양으로 질로 저울로 재야 하는 법. 많이 배웟냐 못 배웟냐의 차별로 사람을 저울대에 올린 것처럼 가볍게 처리하는것 마냥 우리는 무수한 많은 저울을 재곤 했다. 인간이 먼저냐 돈이 먼저냐는 이젠 구닥다리 철학이 된 것이다.

 

 이 만큼 무섭게 사람의 정신을 홀딱 해쳐 놓아도 여전히 대우는 누가 받는가? 결국 돈이 절대적인 神聖이 되었다. 사실 자본주의의 최대 목적은 나 이외엔 절대 다른 神을 섬기지 말라는 법을 성공한 것이다.

 

  돈이 절대적인 神이 된 이후는 전설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두 공룡처럼 멸종 되어 가고 있다. 돈 빠진 이야기는 재미도 없고, 방송에선 하루만 주식값을 방송 안하면 전쟁보다 더한 난리를 필 것이고

노숙하는 자들은 크리스마스때만 모셔서 밥주고 재워주는 적선을 베풀 것이며, 집없는 자들을 위해서 고리로 돈을 빌려줘 장기상환으로 꼭 돌려 받으라는 법도 아주 편리하게 만들어 놓은 것인데.

 

 그래도 말이다. 멸종 되어가는 인정이라도 살아 있다는것이다. 그들은 알아 달라고 보채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지구의 축을 따라서 돌고 있는 이 우주를 늘 바라보고 있는 눈빛을 갖고 있다.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는 모든 자연의 이치를 알고 있는데. 뭐가 없다고 부족하다고 전전긍긍 할 것인가?

 

 되레 많은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이의 떡이 더 커보여서 그게 싫고 욕심이 나는 것은 지금만 있는 일이 아니다. 이렇고 보면 조금은 여유를 가져도 탓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조금 불편하고 조금 없어도 마음은 되레 더 널럴하고 자유로워진다. 무슨 도 닦다가 하산했냐고 물을 애기지만 진짜 그렇다. 무엇이든 너무 많은 것은헐해지고 흔해져서 마음이 갈 데 가 없어진다. 네 마음이 있는 곳이 보물이 있다고 했다. 그 보물은 나를 찾는 것. 나와 함게 꼭 누려야 할 인간의 지성이 곧 편안이다.

 

 나의 요즘 인사는 안녕하세요에서 편안 하신가요? 이렇게 바뀌었다.

돈 방석에 앉아 있어도 불편한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언제 누가 나의 돈을 훔쳐갈까 노심초사하는데 편안해 질리가 있는가? 부자의 창고는 늘 채워져 있어도 마음은 늘 허전해서 더 더 하는 것은 만족을 모르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만족을 모르는 부자는 진짜 부자가 아니다. 고무즐 없는 팬티랑 똑같은 신세다.

 

먼저 나를 알자... 내가 이지구에서 사는 이유를 한 번 깊이 상고 해보자는 거다.

부자 되기가 먼저냐? 나를 먼저 찾느냐

가난해도 당당한 나를 누가 만드냐?

늘 불안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 했던 만큼 나를 알고자 하는 노력이 바로 가난해지는 방법 중에 첫걸음이다.

걸음마는 처음부터 쉽게 되지 않는다.

백번연습은 기본이다. 먼저 실패를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멸종 된 공룡처럼 등뼈만 남길 종족은 아니다.

사람이기에 두고두고 따뜻한 人精을  남기고 싶은 거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