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떡국 먹는 날 아침, 대체 어른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심도 있는 밥상토론을 한 적이 있다. 울 아버지는 꼬추에 털 나면 그때부터 어른이라 하셨고, 장가를 가야 진짜 어른이다는 울 어머니의 반론이 이어지자 밥상머리에 둘러앉았던 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의견을 개진했다.
밥벌이를 할 수 있으면 그때부터 어른이다, 자식새끼를 낳아봐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갑론을박 하는 통에 나도 한마디 거들게 됐다. 물론 당시엔 ‘꼬추에 털 나면 어른’ 임을 주장한 울 아버지를 제외하면 그 누구에게도 어른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나의 주장 인지라 철저히 묻혔지만 억울해서라도 한번 재탕해본다. 모름지기 어른이 되어간다 함은 이런 거다.
a. 예전에 믿었던 것들을 점점 믿지 않게 된다.
b.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c. a와b의 연산이 반복된 결과 사고의 폭은 좁고 불신의 폭은 깊은 인간이 된다.
a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어 보면 안개 낀 성탄절의 산타이야기는 모두 엄마의 농간이었음을 알게 된 소년의 불신이 되겠다.
a를 뒤집어 놓은 b의 대표사례로는 수십만 개의 촛불이 자발적으로 켜지는 오늘을 수긍하지 못하고 기어이 양초 값을 대준 배후세력의 존재를 확신하는 뒷방 영감님의 믿음이 되겠다.
그리하여 c의 경지에 다다르면 ‘나는 이제 마누라도 안 믿어, 자식새끼는 더더욱 못 믿지. 요새 젊은 것들이 더하면 더해! 그러니 윤영감도 뒤질 때까지 선산만은 손에서 놓지 말어, 그게 자네의 마지막 희망이야.’ 같은 어른스러움을 자랑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그 어른이라는 말, 그다지 아름답게 들리지는 않는다. 흡사 변질이나 변절을 꼬집는 말처럼 들리는 탓이다.
‘자네도 이제 어른 다 됐네, 정말 많이 변했어!’ 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은근히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 칭찬 아닌 칭찬을 듣고 당황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그 말에 익숙해질수록 나 역시 쓸 만한 방패 하나를 주워서 들었다. “내가 변한 게 아니라 내가 믿었던 것들이 변했다” 고.
2. 참여정부 말부터 최근까지 근 5년 동안 나는 앞서 언급한 기묘한 칭찬을 들을 때마다 이 방패를 아주 잘 써먹었다.
내가 변한 게 아니라 노무현이 변한거야. 나는 여전히 바보 노무현의 순정을 굳게 믿고 있는 어린인데 노무현이 변했어, 내가 지금 노무현을 까는 건 찍어놓고 딴소리 하는 게 아니라 광신적인 “노빠” 들과는 다른 비판적 지지를 표현하는거야. 이런 졸렬한 변명으로 나는 그를 어른중의 어른, 꼰대가 되어버렸다며 매도했고 나는 변치 않았다며 자위했다.
그리고 지난 23일 이후 오늘 까지의 시간은 결국 내가 틀렸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실은 그 반대였던 것이다. 변한 건 그가 아니라 나였고 나는 영락없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예전에 믿던 것들을 더 이상 믿지 않고,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인색한 딱딱하게 굳은 인간이 되어있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 그는 이미 멀리 떠나버렸다. 그래서 목 놓아 울었다.
뒤늦게 울었던 건 나뿐만이 아닐 거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났더니 슬슬 옆구리를 찌르는 이들이 한둘씩 생기는 거다. 아예 삼년상을 치를 셈이냐, 한 일주일만 지나면 무엇이든지 [망각의 쿨타임] 속으로 사라지는 국민성을 자랑하는 나라에서 왜 쓸데없는 짓이냐며.
그래 말 잘했다.
그래서 아예 삼년상을 치를 생각이다. 이번만은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된다. 삼년 뒤면 찾아올 다음 선거를 위해서라도 나는 악착같이 기억해둘 거다. 흔히들 장난스럽게 말하는 [ 망각의 쿨타임 ]을 이번만큼은 정말 오래오래 끌어볼 것이다.
세부적인 실천 방안으로 남은 삼년간 “이게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라는 각하의 음성을 모닝콜로 삼아 아침마다 치를 떨며 일어나는 것도 좋은 방법 일 것이다. 매일 자장가로 그 남자가 부른 상록수를 들으며 눈물짓는 것 또한 꽤 괜찮은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남은 삼년을 매일같이 와신상담하는 각오로 살아갈 사람들은 극소수라는 것 또한 다들 알고 있으리라. 이렇게 말해놓고도 나 같은 필부는 어느새 먹고 마시며 텔레비전 앞에 앉아 실없이 히히덕거리고, 생활에 치어 허덕이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꾸역꾸역 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된다손 치더라도 중요한 날만큼은 잊지 않겠다, 그런 바람이다. 1년 365일을 빈소를 향해 걷던 유시민처럼 불타던 눈빛을 하고 살 수는 없다. 그러나 ‘개가 나와도 당선될 것’ 이라는 외신보도가 나오던 이상한 계절로 돌아가는 일만큼은 절대 없도록 해야 하지 않겠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앞으로 삼년간, 일 년에 한 번씩 돌아올 5월 23일, 지방 선거, 총선 그리고 대선. 이때마다 담배 한 가치를 찾던 그 남자를 되새기는 걸로 충분하다. 아주 극단적으로 말해 앞으로 삼년 중에 단 일주일 정도만 우리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지금처럼 다시 슬퍼할 일은 없을 것이다. \
3. 여기 까지 읽었으면 다시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열심히 투표하라는 말인데 대체 어디를 밀어달라는 말이냐.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이 아니겠는가. 친일파를 모태로 한 자본과 수구언론이 몸을 섞은 “그들”의 선택은 단순하다. 그들은 줄곧 기득권 유지라는 하나의 명제만을 생각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서운 집중력을 보여 왔다.
반면에 우리가 지켜야할 가치들은 너무나 다양하고 서로 얽혀있어 구체적인 방향을 정해야 할 때면 서로 싸우고 기우뚱 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반대말은 하나로 정해질 수 없고 그들에 맞서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시 흐름은 노무현에 대한 안티테제를 넘어 진테제로 향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흐름을 되돌리기 위해 그들은 악착같이 버틸 것이다. 이미 촛불과 사상 초유의 국민장 앞에서 신경이 곤두선 그들은 형식적 정권 이양 뒤에 막후의 상왕 노릇을 하며 2010년 까지 대한민국을 통치 하시겠다던 전두환 장군님을 벤치마킹 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 앞으로 있을 세 번의 선거 - 지방선거, 총선, 대선 -에서 우리는 최대한 한나라당에 표를 안주는 방법으로 한국 정치의 기초체력을 다져놓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선거인 대선에서는 후보 단일화를 통해 결집하는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다고 할 거다. 16대 대선에서 민주 노동당 지지자들에게 진보 진영의 분열은 사표(死票)만을 낳게 되니 가장 가능성 있는 진보진영의 우군, 노무현에게 일단 힘을 빌려주고 총선에서 우리 다시 한 번 만나자며 읍소했던 ‘사표론’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탄핵정국 이후 있었던 17대 총선에서 지역구는 열린 우리당에게, 비례대표는 지지 정당에 나눠달라던 호소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지방 선거와 총선은 反한나라당에 투표하고 다가오는 다음 대선에는 노무현의 정치적 적자 하나에게 힘을 몰아주자’ 는 발상을 고루하게 여기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7,8년 전 프레임을 다시 반복해야 하느냐며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2009년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시계추는 다시 그 시절로 퇴행했다. 그렇다면 결국 그 시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은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시계추를 되돌려놓은 우리의 업보다.
스스로를 “수구꼴통”들에게 맞선다고 믿는 사람들이 정당의 이익과 계파간의 갈등관계에 상관없이 하나 될 수 있는 구심점, 노무현은 우리에게 그것을 선사해 주고 갔다고 믿는다.
다시 한 번 뭉쳐보자.
MB의 후임자나 제4공화국의 공주가 대통령이 되는 불상사는 막아야 하지 않겠나.
하루는 길지만 일년은 짧다.
앞으로 삼년이다.
나는 삼년상을 치르겠다.
퍼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