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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포도에 얽힌사연


BY 감순2 2000-05-14

미국 이민 와서 살림을 장만할 때 큰맘먹고 은쟁반을 한 개 샀다.
그럴듯 하게 써먹지 못하고 있었던 차에
처음으로 알게된 소설가 가족을 집으로 초대했다
그 집 막내가 우리 딸아이 친구이기에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모두들 바쁜 만큼 간단한 식사 대접이 서로에게 부담이 없으니
곧잘 냉면이나 국수 등을 나눠먹곤 했는데
그날 난 만두를 빚어 떡국을 대접했다
후식으로 청포도를 내 놓으며 모시수건은 아니지만
그야말로 은쟁반에 하이얀 수건을 깔아
내 멋스러움을 한껏 과시하려고 있는 폼 다잡았었다.
언제 적부터 꼭 해보고 싶었는데 처음으로 은쟁반에 청포도를
먹어보노라는 얘기도 하며
내가 그다지 가식적인 사람이 아님도 알렸다.
그 집 남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집안의 어려운 어른 같으신 분 이기에 우리는 '당숙 어른'이라
불렀다
식사도 멋진 후식도 즐거운 담소도 끝나고 손님들이 가시는데
난 친절히 문밖에 나가 공손하게 안녕히 가시라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런데 아뿔싸!!
내려다 본순간 자주색 와코루 파자마가 눈에 띄었다
난 그 자리에서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고 말았다
세상에 그 어려운 당숙님을 내내 파자마 바람으로 모시었으니
뻗쳐오르던 내보람 우습게 무너졌나니...
그 후로 만나면
내가 무안할까봐 그랬는지 당숙 부인의 대형 사건들이
줄줄이 나오는데 얼마나 배꼽 쥐며 웃었는지 모른다.
그녀가 만삭의 몸으로 손님 앞에서 술상을 들다가 '뽕' 한일,
서툰 솜씨로 애기 업고 나들이 하다가
우연히 여고동창 부부를 만나
인사 하는데 속곳이 다 흘러내려 있었다는 일,
남편 대학동기 모임이 있는 연회석상에서
움료수인줄 알고 마신 칵테일에 졸도하여 앰브란스에 실려 가는데
중간에 깨어났지만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어 응급실까지
갔다는 등
만나기만 하면 재담 좋은 그녀 입에서
끊임없는 얘기가 쏟아져 나오니
청포도 멋들어지게 먹던 날의 내 실수는 은근슬쩍 덮어졌다.

콜로라도 에서 감순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