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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은 날


BY 울보 2000-06-08

비가 내린다. 창밖에도 내리고, 내 마음에도 내리고.
가끔씩 내게 찾아오는 이 우울과 슬픔.
그 누구도 채울수 없는.

가끔 이렇게 우울해지는 내 자신을 생각하면 정신병원에 가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월이 갈수록 내가 행복할 때는 꼭꼭 숨어있던 그 상처들이 어떤 계기가 되면 다시 살아나 내 마음을 슬프게 한다.

지지리도 가난하던 어린 시절.
내 어릴 때 기억은 눈물과 배고픔, 그리고 슬픔뿐.
늘 아버지와 어머니는 싸웠고, 오빠 둘이 싸웠다. 언니와 내가 싸웠고, 난 늘 울었다. 힘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는 일 뿐.

조실부모하고 경제력 없는 아버진 외동이셨는데, 아이 욕심은 많으셨다. 그래서 여섯을 낳으신 것이다. 그 많은 자식들이 먹고 공부하려니, 자연히 어머니의 고생이 심했다. 남의 집 가정부를 막내 데리고가서 하신 적도 있고, 집에서 하는 부업도 했었다.

그러니 많은 식구가 늘 좁은 방(남의 집에서 세를 얻어)에서 복잡하게 생활을 했고, 주인 눈치를 보며 기가 죽어 지냈다. 어린시절 집주인들은 대개 식구많은 사람들을 싫어했다.

(요즘이야 주민등록등본을 떼면 전산으로 현주소만 나오지만, 예전엔 이사한 주소들이 열댓번씩 주루루 달려 나오면 정말 어디 주민등록등본 내 놓기가 창피할 정도였다.)

열몇살의 나이에 벌써 살림과 가난을 알게 되었고,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된 것이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상태에서 아버지와 오빠 언니 동생을 맡아 살림을 살게 된 것이다.

언니는 그때 염색공장에 다녔고, 또 덜렁대며 놀기를 좋아하여 집안일은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어린 나이에 밥과 반찬을 만들며, 끼니꺼리가 없으면 시장에 가서 쌀이나 라면등을 가게에서 외상으로 얻어왔다.

얼마나 엄마를 그리워했던가?
엄마 언제 오시나요?
엄마 보고싶어!

여름 장마철에 되면 초가집에서 기어나오는 벌레.
그리고 수도도 없는 집, 하수도도 없는.
비가 오면 마당에 고인 빗물을 하염없이 퍼곤 했었지

그렇게 국민(초등)학교를 졸업하곤 중학교 입학도 하지 못할 뻔 했으나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야간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낮에는 자개공장, 양초공장에서 몇 만원 벌어서 생활비 조금 드리고 용돈을 썼다. 그 때 같이 다니던 아이들 중엔 고아원 출신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가정부도 있었다.

3년을 보낸후 실업계 야간에 입학하여 또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식당 설거지, 어린이 신문팔이를 하며 꿈을 키워 나갔다.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성적도 좋지 않고, 어마어마한 등록금때문에 취직을 해서 1년6개월 동안 돈을 모았다. 6개월동안 대입 준비를 했고...드디어 대학에 입학을 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늘 등록금 압박에 시달려 죽자사자 공부만 했다. 남들보다 2년 늦게 들어간 대학. 동기들이 거의 2-3살 어렸다. 4년동안 학교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여 장학금으로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졸업당시 취직의 문을 두드렸으나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난 우수한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고배를 마셨다. 고집을 부득부득 세워서 진학한 대학이었는데,

엄마는 대학 졸업하고도 집에서 빈둥빈둥 논다고 나를 타박했다(고등학교 졸업해서도 공장에 가서 몇십만원 씩 벌어오는데 하면서)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학력을 속이고(대졸이라니까 학원에서 꺼렸다) 아이들에게 주산과 속셈을 가르쳤다.

죽자사자 공부하여 졸업한 내가 6,7살 먹은 아이들을 오전에 가르치고, 오후엔 초등학생을 가르쳤다. 추운 겨울 썰렁한 학원에 출근하여 착화탄으로 불을 피워서 연탄난로에 열기를 만들고, 하루 일과가 끝나면 학원 방방마다 청소를 했다.

멸치처럼 생긴 원장은 얼마나 깐깐한지, 하루에 청소를 두번 시켰다. 점심먹고 한번, 퇴근 전에 한번.

하고싶은 일을 하고 살면 몸이 파김치가 되어도 행복할 텐데, 이건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밤잠을 설치며 베개를 적신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아! 세상이 나를 버리는구나
내가 그다지도 원하는 취직의 길은 이렇게도 멀고도 험한가?

대학을 졸업한 후 1년을 보내고 나서 드디어 내가 원하던, 그렇게도 바라던 취직이 되었다. 날듯이 기뻤다. 뛸듯이 기뻤다. 꿈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너무나 삽시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리곤 3년후 결혼을 했다. 평범한 남자와, 맞선으로,
아이를 낳았고, 지금도 그렇게 원하던 직장생활을 한다.
(난 어릴때 너무도 지긋지긋하게 가난을 겪었던 지라 죽었으면 죽었지 가난하겐 살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온 인생이다 보니, 중학교 친구도 연락이 두절되고, 고등학교 친구들은 내가 진학하는 바람에 끊어졌다. 대학교 친구들은 나이 차이 때문이기도 하고, 다들 삶이 바빠서 거의 연락이 없다.

직장엔 여자직원에 몇있어도 서로 업무가 바빠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여가가 없고, 가끔씩 살아나는 이 슬픔을 누구에게도 이야기 할 수가 없다. 남편에게는 더욱더 그렇다.

비가 내리는 이런 날은 민감하고 감수성 풍부한 나를 더욱 센티멘탈하게 만든다. 목까지 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이 글을 씁니다.

길고 재미없는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