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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도 의리라고 생각해요


BY 칵테일 2000-07-26

이틀전 둘째 시고모부님께서 운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삼성의료원 영안실에서 손님치레를 돕고, 장지를 천안공원묘지로 모셔서 오늘은 거길 갔었습니다.
2000년이 밝아온지도 벌써 반년이 넘어가서 그런가, 빼곡히 채워가는 석관묘소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었습니다.
우리측 인원이 많아서 다소 부산스럽게 장례를 치뤘지만, 비교적 맑고 선선한 날씨여서 다들 힘들어하지는 않았죠.

그 장례를 치루는 동안 제 시선을 붙잡는 풍경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묘소 정면에서 맨 끝자락에 위치한 묘소 자리에, 6~7세쯤 되어보이는 여자아이와 함께 온 30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였습니다.
그는 우리보다도 일찍 그곳을 찾아왔었는데, 결국 우리가 떠나올때까지도 그 묘역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고 있었습니다.

몇 몇 사촌동서들도 그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들었는지, 차에 물건을 가지러 가면서 일부러 그쪽으로 향해갔었죠.
역시 아내의 무덤이었습니다.
아내가 죽은 날이 불과 3개월도 되지 않았더군요.
거기다 무슨 우연인지 죽은 아내의 생년월일이 저와 똑같았습니다.
비석에 새겨진 그 생몰연대를 보고는 누구보다 소스라치게 놀란 저였습니다.
38살에 어린 딸아이와 남편을 두고 떠난 그 여인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그 비석 뒷면엔 남편이 지어올린 망부가가 새겨져있었습니다.
생전의 그 아내를 얼마나 끔찍히 사랑했는지가 느껴질만큼 가슴 절절한 사연이 적혀 있었습니다.
얼마나 자주 그 묘소를 찾았는지, 마른 꽃다발이 몇개씩 그 묘옆에 자리하고 있더군요.
술을 한잔 따라 그 무덤 주변을 돌며 천천히 뿌려주고, 또 가끔은 딸아이를 지긋이 바라보기도 하고......
다시금 무덤앞에 앉아 무언가를 죽은 아내에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일어나 하늘을 우러르다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제가 서 있는 위치에서 아주 정면으로 보이는 상황이라, 딱히 눈을 둘 곳이 없던 차에 본의아니게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도 보게 되었었습니다.

가끔씩 눈물을 훔치는지 손수건을 꺼내드는 그를 보며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린 딸아이는 그런 아빠의 슬픔을 아는지모르는지 땡볕이 싫어, 모자를 썼다벗었다하며 장난을 합디다.
가자고 조르는지 아빠 셔츠자락을 붙들고 뱅뱅돌기도 하고......
그럴때마다 아빠는 보채는 딸을 다독이며 좀 더 시간을 끌어보는 것도 같고.....
제 눈에 눈물이 맺힐만큼 너무도 가슴아픈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30년전의 나와 우리 아버지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내 나이 무렵에 세상을 떠나신 내 어머니를 두고, 내 아버지도 그와 같은 슬픔에 하늘이 무너지셨겠지요.
철모르는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채이며, 어쩌면 아버지의 마음을 더욱 서늘하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이유로 죽음에까지 이르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죽고 없는 아내를 추억하는 젊은 망부의 모습에서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이 세상 모든 이치와 조금도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과 헤어지지 않은 한,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한은 절대적으로 지켜야할 것이 의리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너무 고루한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라는데, 요즘 신세대들은 모두 그걸 공감한다지요?
하지만 왜 내겐 아직도 사랑이 그토록 끝도없는 화두가 되어 내 마음을 묶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와 나누는 많은 기쁨중에, 그가 나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제겐 가장 큽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만약 배신을 당했다면 나는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난 항상 의리를 떠올립니다.
정녕 내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을 받는 한이 있어도, 죽어도 내쪽에서부터 먼저 그의 등에 비수를 꽂는 일은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제겐 목숨처럼 지켜가야 할 내 사랑의 진실입니다.


**사족 : 나는 모든 사람이 다 내맘같이 살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분들의 생각이 저와 달라서 내가 너무 고루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오래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내가 남자가 아니냐고 까지 이야기하신 분도 있어, 상당히 충격이었습니다.
난 남자를 성적인 대상으로만은 보지 않습니다. 물론 사랑하는 이와 나누는 에로스를 존중합니다. 왜 결혼이란 것을 했는지, 남편이 나에게 어떤 사람인지.... 더불어 살며 그와 세월의 두께를 높여갈수록 더 더욱 사랑은 의리라는 생각을 하고 사는 제가, 정녕 잘못된 것일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칵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