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언·서울대 의대교수〉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다. 환자면 다 같은 환자일 것으로 생각하지만 세
상일은 그렇지 않다. 공식적으로는 의료비 지급을 어디에서 하느냐에 따라 의료
보호, 의료보험, 산재보험, 자동차보험 환자 등이 있다. 그리고 비공식적으로는
‘보통 환자’와 ‘특별 환자’가 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현상은 의사는 절대 환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의사 스
스로, 그리고 비의료인들이 막연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치 의사들이 입고 있
는 흰가운이 병에 대한 방탄복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병에 대해 아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의사가 사는 방법으로 살면 건강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
른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술 많이 마시고, 담배 많이 피우며, 수당도
안 주는데 시간외 근무를 즐겨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의사들이다. 따라서 의사
가 사는 식으로 살면 환자 되기 십상이다.
내가 만약 환자가 된다면 ‘일류 환자’가 될 자신이 있다. 의료에 관한 지식
과 경험은 물론이고 의료보험을 포함한 우리나라 의료 체계의 허와 실에 대해 속
속들이 꿰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병원에서만 진찰을 받겠다. 절대로 약국에 가서 내 증상을 이야기
하고 ‘진찰’을 받을 생각이 없다. 약사는 의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약국은 약
을 사고 파는 곳일 뿐이다. 물론 약을 복용하는 법에 대한 다소의 설명을 약국에
서 들을 수는 있다.
둘째, 병원에서 받은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가면 반드시 그 약을 사겠다. 비
슷한 약은 과감하게 거절하겠다. 같은 종류에 속하는 약이라도 개개인의 특성이
나 병에 따라 효과와 부작용이 얼마나 다른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감기같이 가벼운 병 치료에는 차라리 내 돈을 더 내고, 각종 암과 같은
심각한 병의 치료나 큰 수술에는 보조를 많이 받는 쪽으로 의료보험제도가 개선
되는 것에 찬성표를 던지겠다. 그리고 의료보험 수가 인상을 받아들이겠다. 내
자신이나 자식들이 중병에 걸렸을 때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
기 때문이다.
넷째, 그뿐 아니라 정부수립 이후 지금까지 거의 민간에 맡기고 팔짱을 끼고
있다가 가끔씩 오히려 도움이 안 되는 쪽으로 간섭이나 해오던 정부에 의료보험
제도 개선과 공공의료 확대를 위해 투자할 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겠다. 우선적
으로 시급하게 개선, 확대되어야 할 것은 응급진료 체계이다.
현재 응급실 진료수가로는 경영의 귀재를 초빙해 와도 제대로 된 응급실을 절
대로 운영할 수 없다. 그러니 응급 환자를 살리기 의한 최신 기법을 도입한다는
것은 꿈도 못꾼다.
우리나라에서 교통사고와 같은 재해를 당하고 나서 사느냐 죽느냐는 거의 팔
자나 재수에 속한다. 따라서 평소에 신심을 가지고 기도를 많이 해 놓을 것을 권
한다.
다섯째, 의료제도가 앞으로도 현재같이 유지될 전망이 보이면 지금보다 더 열
심히 피땀 흘려 돈을 모으겠다. 그래야 급한 경우에 외국의 저명한 병원에서 제
대로 된 진단과 치료를 받을 수 있으니까. 단, 병원에서 사용하는 영어나 일어
표현정도는 꾸준히 열심히 연마해 놓아야 한다. 최근 우리가 부러워하는 한 선진
국의 병원에서 그 나라 말을 못한다고 입원을 거절했다는 놀라운 소식이 있었다.
여섯째, 힘 있는 사람들이 병원이나 의료에 관해 비판하거나 약속하는 것을
믿지 않겠다. 평소에 그렇게도 국민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고 하지만
, 그들은 여차하면 일본이나 미국에서 지병을 치료하거나 아니면 국내 병원에서
라도 특별 대접을 받는 범주에 속한다. 따라서 ‘보통 환자’들이 지금 겪고 있
거나 앞으로 겪게 될 어려움과는 어차피 전혀 상관이 없다.
‘보통 환자’여러분, 긴 잠에서 깨어나 정부에 요구하십시오.
시민단체 여러분, 여러분의 훌륭한 식견과 끊임없는 열정을 가지고 한국의료
를 살리기 위해 강력하게 건의하고 예의주시해야 할 대상은 병원이 아니고 정부
입니다.
언론인 여러분, 언론인이 의사의 적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의료계도 언론의 적
이 아닙니다. 우리 공동의 적은 잘못된 의료정책과 왜곡된 의료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