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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냥 수다


BY 짱아 2000-09-02

세월은 유수와 같다는데, 정말 시간은 빨리도 지나는 거 같아요. 제가 아기를 갖었다는 것을 안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산달이니 말예요. (이번달 말일이 예정일이거든요)

그러니까 2월1일이었어요. 제가 시중에서 시판하는 임신검사시약으로 테스트를 해 본 날이. 전 주기가 거의 정확한 편이었어요. 그런데 이틀정도가 늦어졌고, 그러자 바로 '어쩌면...'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이틀 늦어진 걸로 바로 임신을 생각하는 건 너무 앞서는 생각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1월 초순경에 이상한 꿈을 꿨었거든요. 꿈에서 깬 순간 여느 그것과는 다르다고 느꼈어요. 혹시 태몽이 아닐까 했지만 그때는 설마하며 그냥 지나치고 말았는데, 검사시약의 반응란에 선명해지는 붉은 두 줄을 보면서 '아, 그때 그 꿈이 태몽이었구나!'했죠.

임신인 건 알았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몰라 막막하기만 했어요. 능력도, 돈도 없으면서 일을 저지르고 말았으니 정말 암담했죠. 아직도 졸업이 까마득한 학생인 남자친구, 그리고 실업자인 저 자신. 무엇 하나 내세울 게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남자친구는 집에다 곧 얘길하고 허락을 받겠다고 하면서, 절 안심시키려 했지만 그 또한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맘이 편치 않았어요. 그런 와중에도 병원에 다니고 아기용품 카달로그를 이것저것 보며, 잘 될 거라고 믿으면서,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둘다 애를 썼어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채 그냥 그렇게 짧은 2월달이 끝나가고 있었어요.

2월 말경, 더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남자친구는 고향집에 전화를 했어요. 전화를 해서는 다짜고짜 결혼을 해야겠다고 하는 아들. 처음엔 아들 녀석이 장난하는 줄 아셨다가 자초지종을 전해 들으신 남자친구의 어머니는 곧장 서울로 올라오셨죠. 그날밤, 전 할아버지 생신으로 큰집에 가야하는 것도 약속이 있다는 핑계로 안 가고, 집에 혼자 남아 그의 전화를 초조하게 기다렸어요. 뭐라고 하셨을까? 어쩌겠니, 일이 그렇게 되었으면 합쳐야지라고 하셨을까? 아니면 절대 안되는 일이라고 하셨을까? 온갖 생각들로 머리속은 엉망이 되어 버렸어요.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전화가 왔어요.
"안된다고 하신다."
순간 눈앞이 까매지면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어요. 나름대로는 갖가지 상황에 따라 마음의 준비를 해야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너무나 당황스러웠죠.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어요. '아닌데, 이게 아닐텐데, 그래, 이건 악몽인 거야!' 하면서 말이예요. 다음날 남자친구와 함께 어머님을 뵈러 갔어요. '잘될 거야!' 속으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되뇌이면서. 하지만 결과는 제 바램과는 정반대였죠. 안된다고 하시는 어머님 앞에서 전 아무런 말도 못한 채 눈물만 쏟고 있었어요. 차라리 어머님이 제게 냉정하게 하셨으면 저 자신이 오기로라도 우겨볼 수 있었을 텐데, 어머님도 무척 마음 아파하셨어요. 완고하고 엄하신 아버님을 설득할 자신이 없다고, 당신이 능력이 되면 돕고 싶지만, 그렇지가 않으니 어쩌냐고 하시는데, 아기는 둘째치고 어머님 입장이 제게 전해져 맘은 더욱 아팠어요.

따로 한쪽 방에 들어온 우린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서로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결론은 <그것>뿐이라는 걸 어떻게 입밖으로 낼 수가 있었겠어요.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우리 둘은 서로를 안고 울 수 밖에 없었지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그래, 그는 차마 내게 먼저 <그것>을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마저 그에게 떠넘기지 말자. 그러니 내가 말하자. 내가 그렇게 하겠노라고 내가 말하자.'하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제 행동은 그에게 매달리고 있었어요. 꼭 그렇게 해야만 하냐고, 말이 아닌 눈으로 행동으로 그에게 묻고 있었죠. 그걸 느낀 남자친구는 더욱 괴로워하고, 괴로워하는 그를 보며 저 또한 슬퍼하고. 철없는 연인인 둘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눈물만 뿌리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