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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의 비극 (퍼온글)- 한겨레신문에서


BY fishwanda 2000-12-02

[이원섭칼럼] 황장엽씨의 '비극'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분단의 모순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냈으나 개인적으로는 `불운한' 사람이다. 일흔넷 인생 황혼기에 가족을 남겨두고 망명한다는 것은 보통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자신도 한 몫 거들었던 북쪽 체제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마지막 방법으로 남쪽에서 무언가 일을 꾀하겠다고 왔는데, 이제 남쪽에서도 부담스런 존재가된 셈이니 그로서는 좌절감과 함께 허탈감이 들 터이다.
그로서는 이런 상황 반전이 매우 당혹스러울 것이다. 그가 남쪽으로 넘어올 당시는 북한 수령 독재체제를 타도해야 한다는 그의 지론이 당연히 환영받을 때였다. 그의 망명 자체가 북으로서는 치명타였다. 그러나북한 정권의 실체를 인정하고 대화를 통해 민족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과는 근본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다. 활동을 중단하자니 인생을 건 `결단'이 빛을 바래고, 나서서 활동하자니 모처럼 형성된 남북 화해를 훼방놓는다고 `견제'를 받는 형편이다. 그런 뜻에서그는 때를 잘못 만난 셈이다.


상황 반전에 존재의의 퇴색


그의 `불운한' 처지에 연민의 정이 느껴지지만 문제를 민족차원으로 넓혀보면 판단은 전혀 달라진다. 그의 신념이 과연 옳은 것인지 현실에적합한 것인지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객관적 검증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북한 최고위층이었다는 특수 신분이 그의 발언에 무게를 실리게 하고그의 발언에 기대 극우 냉전론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 때문에 더욱냉정히 검증되어야 한다.

그의 신념은 북한은 변하지 않으며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수령 독재체제를 붕괴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압축된다. 그 수단으로 북한에 대해경제적 지원을 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론 분열을 가져올 노동자 파업 따위는 `사치'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북한 인민들이 미몽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북한 민주화 운동'을 벌여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는 그의 뜻과 상관없이 남쪽민주화를 억압했던 극우 반공세력들이 주장해온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냉전세력들의 주장에 따른 결과는 어떠했는가. 북한은 무너지지도 않았고 남북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됐으며 한반도 평화는 늘 위협을 받았다. 1994년 여름 핵 위기 때 우리도 모르는 새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뻔한 고비도 겪었다.

남북의 정상이 만나고 전 세계가 남북의 화해 노력을 지지하며 한반도 평화가 정착되기를 바라는 마당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정권을 타도하겠다는 그의 소신은 주변 정세 등 객관적 상황을 무시한 것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무엇보다 황씨가 주장하듯 북한에 대한 목조르기를 강행하면 가장 피해를 입는 것은 그가 구하겠다는 북녘 동포들이다.

이렇게 따져보면 그의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발언에 실체 이상의 무게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세력들은 계속 그의 `착각'을 유도한다. 정략적으로 그를 이용하려는 술수가 판쳐 입지는 더욱 좁아진다. 그로서는 이를 경계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그가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면담을 취소한 것은 잘 한 일이다.


현실 무시한 `북한 민주화론'


텔레비전에 비친 그의 모습은 초췌했다. 그만큼 마음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망명 생활 3년여를 지내 이제는 이곳 물정을 알 법도 한 그가 외곬 논리를 고집하는 것은 깐깐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폐쇄된 생활에서 비롯된 면도 큰 것 같다. 한정된 사람들과만 만나는 고립 생활은 스스로의 사고 틀에 갇혀 관념론에 빠지기 쉽다.

그가 진정 민족문제를 고민한다면 주위를 넓히고 허심탄회하게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필요하다. 북쪽에서 `배신자'로 찍히고 남쪽에서도 부담스럽게 여겨진다면 그의 개인적 `결단'이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그의 뜻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분단을 진지하게 고뇌한 한 지식인'으로서의 자리마저 부정당하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논설실장ws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