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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편지.


BY 나의복숭 2001-01-18


어머니.
자고 일어났드니 눈이 키만큼 쌓였어요.
쓸고 또 쓸어도 자꾸만 쌓이는 눈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오늘은 마침 저보다 10일 먼저 들어온 일병이 휴가를
간다기에 부랴부랴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글씨가 엉망이라도 용서하십시요.
한자라도 더 빨리 더 많이 쓸려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할말이 탁 막킵니다.
늘 늘 그리운 어머니였는데 왜 갑자기 말이 막히고
할말이 없는지....
아버지께서도 잘 계시겠지요?
저도 잘 있습니다.

어머니보내주시는 편지는 한통씩 받으면 좋겠는데
한꺼번에 몇통씩 받습니다.
편지 전달하는 전령이 귀찮으니 제때 편지를 안가져오는지...
패죽이고 싶어요..

첨 입대했을때는 자주 온 편지인데 인제는 다 끊기고
어머니외에는 거의 오질 않습니다.
매일 편지를 보내주겠다는놈들이 겨우 편지 한통 보내놓고
지들도 입대를 해버렸어요.
그러니 편지 보내줄놈이 없어요.

무호도 입대했습니다.
인제 훈병인데 지놈도 저처럼 인제 행복끝. 불행시작이지요.
매도 일찍 맞는 매가 낫다고 하루 먼저 먹은 짬밥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무호를 보면 알것 같습니다.

어제 제 옆의 동기놈은 편지해준다는 친구들이 편지 안한다고
휴가나가면 쥑여버린다고 하드군요. 이를 갈아요.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얌마. 니 친구는 국방부 재산 안되고 니한테 편지만 쓰고 있을까?"
그랬드니 그놈도 고개를 끄득거렸어요.
다들 비슷한 나이인데 지들인들 뭔 용빼는 재주있다고
군대 안가겠습니까?
모두 군에 입대하고 없으니까 편지를 못 쓰는거지요.
서로 편지 안쓴다고 죽일놈 살릴놈 욕을 하지만
그건 어쩌면 저자신들에 대한 회한의 소리일겁니다.
누군가에게 욕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수 없는....

올해는 새해인데 위문품도 없습니다.
나라에서 돈이 좀 쪼들리나 봅니다.
국방부 재산인 우리를 이렇게 푸대접을 하다니요.
엊저녁 빨아놓은 양말을 언놈이 또 훔쳐갔습니다.
잠시 한눈만 팔면 언놈인지 슬쩍 가져가서 미치겠습니다.
저 역시 슬쩍 해와야지요.
전부 이렇게 돌고 돌면서 슬쩍 하는데 양말 안신은놈이
없으니까 결국은 지것 지 신는셈입니다.
쫄병들 도둑질은 살기위한 생존차원이니 결코
도둑질이랄수는 없지요.
양말. 팬티. 런닝. 군화등...서로 눈부릅뜨고 지키지만
그래도 뛰는놈위에 나는놈이 있어요.

어저께는 눈이 펑펑 내리는데 전라도 해남에서
동료의 부모님이 면회를 왔어요.
면회가 안된다고 했는데 설마 오면 안시켜주겠나 싶어서
어머니생각처럼 무대뽀로 오신거지요.
면회를 했나고요?
아니요.
결국 못하고.... 그냥 우시면서 가셨을겁니다.
그 먼 해남에서 오신 늙으신 부모님을 면회시켜주고싶은
마음이사 윗분들도 왜 없었겠습니까만
그러나 원칙이 깨지면 너도 나도 다들 면회를 올거니까
오히려 그냥 가셔달라고 사정을 하셨답니다.

맘이 정말 착찹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처지가 내맘데로 할수있는 처지가 아니잖습니까?
잠자는 시간이 되면 자기 싫어도 눈을감고 자야 하고
밥을 먹기 싫어도 먹어야하고...
안그러면 영창을 가야하는게 우리의 현실이니까요.

자유가 그립습니다.
집에서 얼마나 호강하고 자랐는지 여기 와보니 확실하게 알겠고
나가면 정말 어머니께 효도할거 같습니다.
하긴 휴가가보니까 또 작심 3일이 됩디다만....
내 옆에놈은 쵸코파이에 눈이 어두워 교회도 안다니는놈이
교회믿는다고 줄 섰다가(교회 믿으면 초코파이 2개줍니다)
요새 죽을맛이지요.
기도하다가 잠들어서요 직사리하게 맞았답니다.
구타 없다고요?
공식적으로는 당연하게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공식만 갖고 되는지요?
매일 악쓰면서 훈련받고 악쓰면서 터지고 먹을거에 눈이 벌게서
설치는게 일과지요.
자나깨나 훈련! 깨고나면 먹을꺼만 생각합니다.
왜 이리 단순해졌는지 이러다가 사제에 나가서 공부를
할수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눈이 지겹습니다.
제대하면 동해바다는 쳐다도 안볼꺼고
강원도쪽으로는 오줌도 안눌랍니다.
그래도 내가 없는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겠지요?
보고싶은 어머니.
늘 그리워합니다.
제대해서 나가면 정말 공부도 열심히하고
못다한 효도 할께요. 일단은 믿어보세요.
이만 씁니다.
아들드림.
(인편에 부치는거니까 혹 우표를 안붙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