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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의 몰락과정


BY 왕건시청자 2001-04-30


안녕하세요.여인천하에 대한 글을 올리는 사람입니다.역사드라마에 관심이 많아서요.이왕이면 태조왕건에 대한 이모저모도 관심잇으시다면 읽어보세요^^

현재 <태조 왕건>에서는 궁예정권의 말기상황을 다수의 픽션을 가미해가며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의 거대한 흐름속에서 드라마의중심을 잡아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왕건은 이미 태어날때부터 신의 점지를 받아 삼한을 통일한다는 운명론적인 입장이다. 이는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나와있는 '왕비어천가'식 서술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으로써 과연 이것이 역사의 진실인지는 많은 의문이 드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왕건은 궁예의 폭정으로 인해 운명적으로 나라와 겨레의 안녕을 위해서 '정의의 반란'을 드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915년에서 918년에 걸친 궁예정권의 마지막 순간들을 잘 분석해보면 왕건이 궁예의 몰락에 얼마나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쳤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필자는 이번에는 여기에 촛점을 맞추어서 논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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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지태가 죽은 이후 궁예와 왕건의 대립구도는 본격화되어 간다. 이는 겉으로는 '태봉'이란 국가체제 안에 군신간의 형식적인 질서는 궁예와 당시 실권자들이었던 패서세력들에 의해 암묵적으로 유지되었지만 그 내적으로는 치열한 권력투쟁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패서세력들에 대항해 궁예가 자신의 친위세력을 청주인들을 통해 구현하려 했으나 패서세력의 방해공작으로 실패하자 궁예 자신이 이번에는 직접 패서세력들을 위시한 기득권 세력들을 치러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건으로 대표되는 패서세력들은 단순히 궁예의 움직임에 따라 대응하는 수동적 입장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왕건이 이미 910년경부터 궁예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고려사> 세가 태조편에 기록상에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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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나주 관내 여러 군들이 우리와 떨어져 있고 적병이 길을 막아 서로 응원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못 동요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견훤의 정예 부대를 격파하니 군사들의 마음이 모두 안정되었다. 이리 하여 삼한 전체 지역에서 궁예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태조는 다시 전함을 수리하고 군량을 준비하여 나주에 주둔하려고 하였다. 그때에 김언 등이 자기들의 공로는 많은데 상이 없다고 하여 해이하여졌다. 태조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 “부디 해이하지 말라! 오직 힘을 다하여 복무하고 두 마음을 먹지 말아야 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임금이 포학하여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며 아첨하는 자들이 득세하여 호상 음해를 일삼고 있다. 이리 하여 중앙에 있는 자들은 자기 신변을 보전하지 못하는 형편이니 차라리 정벌에 종사하고 왕실을 위하여 진력함으로써 자기 몸을 보전하는 것이 더 낫다.”
: 여러 장수들이 태조의 말을 그럴듯이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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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왕건이 이미 아지태 사건 이전부터 궁예가 자신을 비롯한 패서세력들을 어떻게 대우하던간에 궁예에 대한 잠재적인 비토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궁예와 왕건의 대립은 아지태 사건으로 인해 한층 더 격화되어 마침내 궁예의 미친듯한 반격에 잠시 왕건이 몸을 피하여 나주로 내려가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기록에서 궁예가 많은 대신들과 백성들을 죽였다는 것은 물론 과장이 섞여있겠지만 특히 궁예가 자신이 야망을 펼치는데 사사건건 걸림돌이 되었던 패서세력들을 이제 노골적으로 국정의 협력대상이 아닌 적대세력으로 간주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궁예가 많은 신하들을 죽였다는 것은 즉, 패서세력들을 궁예가 무자비하게 숙청했다는 것을 말한다. 당연히 패서세력들은 자신들의 존립을 위협하는 궁예를 악마로 묘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시점에서 패서세력들은 궁예를 제거하려 들지 않았을까?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 추정이 가능하지만 무엇보다도 드라마에서 종간과 은부같은 인물들로 상징되는 측근세력들의 기반이 만만하지 않았거나 아직 반란의 준비가 충분치 않았던 데에 연유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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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가 얼마나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려 하는데 혈안이 되었는지를 자명하게 보여주는가는 915년의 강비(드라마에서의 연화)사건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삼국사기>에 이 사건이 묘사되어 있는데 아무리 궁예가 미쳤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나라살림에 대한 간언을 했다고 부인과 자식을 쳐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기록이 왜곡된 것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고려사>에는 아예 궁예가 강비를 죽였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고려사> 세가 태조편에는 대신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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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는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 “나는 미륵 관심법(彌勒觀心法)을 체득하여 부녀들의 음행까지도 알아 낼 수 있다. 만일 나의 관심법에 걸리는 자가 있으면 곧 엄벌에 처하겠다”고 하였다. 그는 드디어 3척이나 되는 쇠방망이를 만들어 놓고 죽이고 싶은 자가 있으면 곧 그것을 달구어 여자의 음부를 찔러 연기가 입과 코로 나오게 하여 죽이었다. 이리 하여 부녀들이 모두 벌벌 떨었으며 원망과 분한이 날로 심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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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어쩌면 궁예가 강비를 죽인 것 자체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만약 사실이라 해도 단순한 광인인 궁예가 처자식을 죽인 그러한 패륜은 적어도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강비가 간한 사안이 궁예가 법에 어긋난 일들을 많이 자행한다는 것이었는데 당시 실정으로 봐서 십중팔구 이는 궁예의 패서세력 탄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비가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은 분명 패서세력들을 등에 업은 것이었으므로 궁예의 입장에서는 강비 또한 제거돠어야 할 대상이라고 본 것이다. 또한 궁예가 강비의 간함에 간통 혐의를 뒤집어 씌워 반격하고 강비에 이어 두 태자를 죽인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는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바와 같이 무슨 불미스러운 사건을 배경에 깔고 있음도 생각해볼수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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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자식까지 희생시킨 궁예는 이를 기화로 더더욱 패서세력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시켜 갔으며 위기의식을 느낀 패서인들은 당연히 왕건을 구심점으로 거의 내전의 양상으로 태봉의 정국을 몰고 갔을 것이다. 이같은 정세를 반영하는 사건이 바로 이후 일어난 궁예의 왕건제거시도 사건이다. 역시 <고려사>의 같은 부분을 보면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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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는 궁예가 태조를 대궐 안으로 급히 불러들이었다. 그때에 궁예는 처형한 사람들로부터 몰수한 금은보물과 가재 도구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는 성난 눈으로 한참이나 태조를 바라보고 있다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그대가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음모한 것은 웬일인가?”
: 태조는 얼굴빛을 조금도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궁예는 또 말하기를
: “그대는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능히 관심(觀心)을 하기 때문에 그것을 안다. 나는 지금 곧 입정(入定)을 하여 보고 나서 그 일을 이야기하겠다.”
: 하고는 곧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이나 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젖히고 있었다. 그때에 장주(掌奏-벼슬 이름) 최응(崔凝)이 옆에 있다가 짐짓 붓을 떨어뜨리고는 뜰로 내려와 그것을 줍는 척하고 태조의 곁으로 달음질하여 지나가면서 귓속말로
: “왕의 말대로 복종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 고 하였다. 태조는 그제야 깨닫고
: “사실은 제가 모반하였으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 라고 말하였다. 궁예는 껄껄 웃고 나서
: “그대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 라고 하면서 곧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굴레를 주었다. 궁예는 또 말하기를,
: “그대가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라”고 하였다.
: 궁예는 드디어 보병 장군 강선힐(康瑄詰), 흑상(黑湘), 김재원(金材瑗) 등을 태조의 부장(副將)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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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록에 따르면 궁예는 거의 왕건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잡았음에도 왕건이 스스로 모반사실을 시인하자 그를 용서해주는 것으로 일단락짓는다. 그렇다면 궁예는 왜 왕건을 살려주었는가?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궁예와 패서세력들은 거의 전쟁 일보직전의 상황까지 치달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양쪽 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는데 필자의 생각에는 실제로 왕건이 이때 모반을 시도했는지도 모른다고 본다. 그래서 이를 기화로 관심법을 핑계로 왕건을 제거하려던 궁예는 최응의 기지로 왕건이 궁예가 예상했던 대답의 반대로 말하자 허를 찔려 순간적으로 그러한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본다. 그것은 패서세력의 상징인 왕건을 실제로 죽여버리면 거기에 수반되는 패서세력의 엄청난 저항으로 나라 자체가 결딴날 위험을 염두에 두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모반을 계획한 왕건에게 일차경고의 의미만을 궁예는 이 사건을 통해 주었는지도 모르는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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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같은 궁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계속적으로 궁예정권의 붕괴를 획책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왕건이 이 사건 이후 나주로 내려가서 자신의 세력을 더욱 광적으로 확산시키는 데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왕건이 자신의 대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번 더 위기를 감수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고경참문 사건'이다. 이는 필자가 따로 나중에 언급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