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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잎이랍니다...글쓴이...소국. 퍼온곳 <문학사상사>


BY 시한수 2001-06-04


나는 잎이랍니다.
어떤 이는 이파리, 잎사귀라고 하구요,
어떤 이는 잎새라고도 부른답니다.
물론 나뭇잎, 풀잎 이렇게 나누어 부르기를 좋아하는 이도 있지요.

그런데 꽃도 나무도 아니고 하필이면 잎이냐 구요?
어디에 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느냐 구요?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면 뉘 집 자식인지, 이름이 무언지,
몇 살이나 됐는지 참 궁금한 것도 많아요.
그보다는 얼마나 착한 아인지,
요즘 무슨 책을 읽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계절과 음악을 좋아하는지 물어보면 신이 나서 대답할텐데.....
조금만 참고 가만히 기다리시면 차차 다 말씀드릴게요.

세상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들에게도 다 이름이 있답니다.
하다 못해 계절 따라 불어오는 바람이 그게 다 그것인 것 같아도
갈바람 갯바람 건들바람 고추바람 꽁무니바람 꽃샘바람 높새바람 늦바람
도깨비바람 도리깨바람 돌개바람 뒷바람 마파람 맞바람 모퉁이바람 북새바람
산들바람 살랑바람 샛바람 선들바람 소소리바람 실바람 재넘이바람 하늬바람
황소바람 호루라기바람 홍두깨바람 회오리바람 흘레바람
그리고 산바람 강바람 바닷바람 솔바람 .......

보이지 않는 바람에도 이렇게 많은 이름이 있으니
세상에 수천 가지의 나무와 풀이 살고 있는 우리들 이름이야 오죽하겠어요.

나뭇잎인 저도 제 친구들 이름을 다 알지 못할 정도랍니다.
이름만큼이나 생김새도 제 각각이죠.
뾰족한 바늘처럼 생긴 친구,
부드러운 삼각형이나 마름모 또는 심장 모양처럼 생긴 친구,
동산 위에 둥실 떠오른 보름달을 닮은 친구,
달걀처럼 둥그스럼한 친구,
맘씨 좋은 아저씨를 닮아 얼굴이 넓은 친구,
샌님처럼 얼굴이 길쭉한 친구,
윤이 반짝반짝 나는 친구, 무뚝뚝해 보이는 친구 ......
우린 대부분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 곡선을 이루고 있답니다.

세상이 모두 책상이나 건물들처럼 반듯하기만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반듯한 고속도로가 빨리 달리기는 스릴 있어 좋겠지만,
다가오고 멀어져 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가슴에 담고 느끼기에는
어디 구불구불하고 오르막 내리막이 있는 산길만 하겠어요?

우리들 세계도 세상사를 닮아서
그 중엔 물론 가시를 닮아서 좀 못돼 보이는 데다
가까이 다가서거나 이웃과 사귀는 걸 싫어하는 친구들이 있긴 하지만
알고 보면 그들도 물이 모자란 땅에서 살다보니
겉모양만 바뀌었을 뿐 마음은 곱답니다.

사실 우리처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정과 사랑을 주려고만 하는 이들도
세상엔 많지 않아요.
저희 친구들 자랑은 아니지만 그건 자신할 수 있답니다.
자연과 아름다운 풍경과 강,
산과 숲과 나무와 꽃과 풀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악한 사람 없다고 하듯이
우리 친구들 중 에 못된 녀석은 없답니다.

사실 제 친구들 중에는 사람과 짐승에게
자신을 희생하면서 도움을 주기도 해요.

사람들은 우리 잎을 따서 차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잎을 찧어서 상처가 나 피가 흐르는 곳에 바르기도 하고,
말려서는 약재로도 사용한답니다.
가을이면 길거리를 온통 노랗게 물들이는 은행잎은
피를 맑게 하기도 하고 잘 흐르게 하기도 하고요,
향기가 유난히 진하고 맑아서 먹을 수 있는 잎들은 허브라고 해서
진달래 화전처럼 음식에 넣기도 하고 천연향수로도 쓰인답니다.

그 뿐인가요.
사슴과 노루와 토끼 같은 예쁜 짐승들도 우릴 뜯어먹지요.
누에나 나비의 애벌레도 우릴 먹고 자라
그 어여쁜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높이 날아갈 수 있는 걸요.
하지만 배추흰나비가 배춧잎을 먹고 자란다는 걸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답니다.

개구리나 풀벌레가 우리들 뒤에 숨어 짝짓기를 하거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도 하구요,
지난번엔 산너머 먼 데서 불어온 바람이
피곤한 날개를 쉬어가기도 하구요
별들도 졸릴 때면 가끔씩 내려와
곤하게 잠들었다가 돌아가기도 한답니다.

여치나 풀무치나 귀뚜라미나 매미는
풀잎에 맺힌 영롱한 아침이슬만 마시고 자라
나중에는 신선이 된다는 믿기지 않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어요.
산 속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풀잎만 먹고살았다는
선승들의 전설 같은 이야기는
우리들까지도 머리를 수그리게 하고 숙연하게 만든답니다.

어떤 얼굴이 유난히 넓은 친구는 어린이들이 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을 때 우산이 되어주기도 한다는 군요.
단풍잎처럼 모양과 색깔이 어여쁜 친구들은
책을 사랑하는 이들의 책갈피에 끼이기도 하구요,
연인들의 사랑편지와 함께 가기도 하지요.

어떤 친구들은 가인과 시인묵객의 사랑을 받아
노래와 시와 그림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소재가 되기도 한답니다.
비보다 먼저 달려오는 바람에 신작로 포플러 잎이
몸을 뒤틀며 온통 하얗게 은빛으로 반짝이는 모습과,
보리밭이 바람에 술렁거리며 누웠다 다시 일어나며
파도치는 모습은 나뭇잎인 저도 참 좋아하는 풍경인 걸요,

난초와 대나무 잎은 매화와 국화와 함께 사군자라 하여
옛 선비들이 가까이 할만한 친구로 쳐서
시, 서화의 단골소재로 삼았답니다.

어느 시인은 짓밟히면서도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우리들을
민초들의 삶에 빗대어 노래하기도 했고요,
또 어떤 이는 '풀잎' 이라고 가만히 불러보기만 하여도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며 우리를 어여삐 여겨 주었어요.
어느 작가는 '풀잎처럼 눕다' 라는 멋진 제목의 긴 글을 써서
풀잎과 삶과 사랑을 이야기했답니다.

기왕 삶 얘기가 나와서 드리는 말씀인데 초로인생(草露人生)이라 함은
밤새 풀잎에 맺힌 이슬이 햇볕이 내리면 금방 사라지는 것 같이
삶의 덧없음을 아쉬워하는 것이랍니다.

인생은 풀과 같은 것,
아름답게 피었다가 스치는 바람결에도 이내 사라져
그 있던 흔적조차 알 수 없는 꽃처럼....

가을이면 덧없이 시들어 가는 풀을 두고 인생의 허무함을 읊은 것이지만
우린 한번 가면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봄이 되면 눈(雪) 아래서 또다시 새순으로 돋아나 영원히 살아간답니다.

비록 가을이면 어느 듯 스러진다 할지라도
첫여름 아침이슬을 머금고 맑은 햇빛에 반짝이는
청초하고 단아한 풀잎의 맵시는
두고두고 삶을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에
잊혀지지 않고 살아 남아있을 겁니다.

길 가던 나그네가 목을 축일 물을 청하자
어느 수줍음 많고 어여쁜 시골낭자는
물을 급하게 먹다 체할까 봐 버들잎을 따서 바가지에 띄워 주었더랍니다.
그 선비와 낭자사이에 무슨 인연의 끈이 맺어졌는지, 아님 그냥 헤어졌는지
뒷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아 모르겠지만
참 아름답고 흐뭇한 풍경 아닌가요?

천안삼거리 주막집의 말못할 사연도 많았을 휘휘 늘어진 능수버들은
수 없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흥겨운 가락으로 남아 오가는 이들의
애간장을 녹인답니다.

혹 들어보셨을 거예요.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밖에는 갈잎의 노래..... "
엄마야 누나야 라는 예쁘고 고운 동요랍니다.

옛날 옛적엔 선비들이 머나먼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다가
짚신이 낡아 떨어지면 가랑잎을 바닥에 깔아 갈아 신고 갔다고 해요.
개울가에서 나뭇잎으로 만들어 놀다 두고 온 가랑잎배는
포근한 엄마 품에서 곤히 잠든 아가의 꿈속에서도 떠다니고 있겠죠?

사람들이 가족끼리 모여 살 듯이 우리도 그렇답니다.
고독을 즐겨하여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녀석도 간혹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서로 모여 살며 친구 사귀기를 더 좋아한답니다.

어떤 친구들은 석 장이나 다섯 장으로 모여나고
어떤 친구들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는 대가족처럼
여럿이 한데 모여나기도 한답니다.

우리들 중에는 그 독특한 모습과 향기로 하여 이름을 얻은 친구도 있답니다.
다섯 손가락을 닮은 오갈피나무,
잎이 갈라지는 모양이 손가락 8개 달린 손바닥 같은 팔손이,
7개로 잎이 갈라지는 칠엽수(七葉樹),
가위로 갈라놓은 것처럼 잎이 깊이 파진 가새뽕나무,
고춧잎을 닮은 고추나무,
작은 깻잎모양을 한 좀깨잎나무,
바늘잎이 좌우로 줄처럼 달린 모양이
한자의 아닐 비(非)자를 닮은 비자(榧子)나무는
잎 모양으로 그 이름을 얻었구요,

잎을 따서 비비면 생강냄새가 나는 생강나무
잎에서 역한 누린내가 나는 누리장나무,
지독히 쓴맛인 소태 맛이 나는 소태나무,
향기가 나는 향(香)나무,
상스러운 향기가 난다는 서향(瑞香),
향기가 백리에 이른다는 백리향(百里香),
잎을 따 물 속에 넣으면 푸른 물이 울어나는 물푸레나무는
맛과 향기로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답니다.

또 어떤 친구들은 어디에 사느냐, 어떻게 사느냐,
살다가는 모양이 어떠하냐에 따라 이름이 지어지기도 했답니다.
잎이 1개씩 떨어지는 낙엽송(落葉松),
깃처럼 떨어지는 낙우송(落羽松),
단풍잎이 특히 붉게 드는 붉나무,
밤이면 잎이 서로 모여서 자는 모양이 귀신같다는 자귀나무,
사시사철 잎이 푸른 사철나무,
겨울에도 잎이 죽지않고 잘 참고 견딘다는 인동(忍冬)덩굴,
주로 개울가에서 잘 자라는 갯버들,
두꺼운 잎이 타면서 '꽝꽝' 소리가 나는 꽝꽝나무가 그러하답니다.

어휴..... 어렵고 산만하고 복잡하기도 하여라.
제 친구들을 소개하는 저도 이렇게 숨이 찬데,
듣는 님들은 또 얼마나 어지러울까요.

순박한 시골아이들은 물가에서 개구리나 물고기를 잡거나,
꼴을 베거나, 소를 뜯기다가 심심해지면 우리를 뜯어 풀싸움도 하구요,
유난히 형제가 많고 가지런히 마주나기한 아까시나무 잎으로는
가위바위보를 하여 이긴 사람이 한 장씩 떼어내며 즐거워한답니다.
우리로선 다정한 형제잎들이 서로 헤어지게 되는 셈이지만
티없이 맑게 웃는 애들의 행복한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며
훗날을 기약한답니다.

우린 서로 더 예쁘다고 다투다가 토라진 것처럼 어긋나기도 하고,
언제까지고 헤어지지 않을 다정한 연인처럼 마주보고 나기도 하죠.
사람들이 더러는 도시에서
또 어떤 이들은 바닷가나 산골에서, 시골에서 살아가듯이
우리들도 산에서 들에서 강가에서 바닷가에서
또 어떤 친구들은 외딴섬에서 살고 있답니다.

하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살던지 불평하거나 설워하는 일이 없답니다.
늘 매연 속에서 사는 친구들이나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공원의 친구가 가엾어 보이기도 하고,
신령님이 계시다는 지리산·설악산 자락에 살거나,
유난히 예쁜 꽃을 달고 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감탄을 자아내는 잎들을
가끔 부러워 한 적이 없진 하지만,
그래도 "나는 왜 이름도 없는 이런 깊은 산골마을에 살고 있을까" 하고
한탄한 적은 맹세코 한 번도 없었답니다.

그저 주어진 운명이려니 하고 태어난 곳에서
이웃 나뭇잎과 평생을 함께 하지요.

물론 저를 친자식처럼 아껴주시는 주인님이 사시고
제가 좋아하는 주인집 아들이 가끔 부모님을 뵈러 오는 이곳이
좋기도 하고 자랑스런 생각이 들어서 참 나는 다행이라고
은근히 혼자 맘으로 생각하곤 한답니다.

바다건너 멀리 다른 나라에서 살고있는 친구들은
우리들과는 사는 모습도 이름도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예전엔 이름조차도 생소했었는데 이젠 친근한 이름도 몇 생겼답니다.
향기도 곱고 자태도 아름답다는 미스킴라일락,
백합 같은 꽃을 피우는 튜립나무,
대학로 변에서 넓은 잎으로 시원스런 그늘을 자랑한다는 마로니에,
낙우송을 닮았다는 메타세쿼이아....
그들이 이젠 멀리서 이사와 이웃이 된 친구처럼
다정한 이름이 되었답니다.

그 중 미스킴라일락은 우리의 정향나무를 저들이 가져다가 개량하여
다시 친정집 나들이하듯이 돌아왔다니
어쩐지 안타깝고 씁쓸한 느낌이 들기도 해요.

나뭇잎 주제에 어찌 그리 잘 아느냐구요?
흙냄새와 보리익는 내음이 실려오는 바람이 가져오는 소식과
계절 따라 그 먼 나라에서 날아왔다 떠나가는 제비나 황새 같은
철새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옵지만
사실은 우리 주인집 텔레비젼이 뒷 뜰 창을 통해 바라다 보이거든요.

그리고 서울에 사는 이 집주인 아드님이 가끔 내려올 때마다
엄마랑 다정하게 소곤대는 나무랑 꽃이야기를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엿들었거든요.
그 아드님은 꽃과 나무와 풀과 숲과 산을,
자연여행과 문화기행을 유난히 좋아해서
우리들의 이야기도 많이 모으고 있답니다.

그이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온 세상에 착하고 가슴 따뜻한 사람들만 가득한 데다가,
여기 제가 사는 곳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도 많은 것 같습니다.

지난 번 언제이던가
갈매기가 끼룩∼끼룩∼ 울며 풍경화 같은 배가 떠있는 수평선을 따라 날고,
짙푸른 파도가 끝없이 밀려오고 밀려간다는 동해안 바닷가를 얘기할 땐
저도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날 밤엔 그이와 함께 백사장을 거니는 꿈까지 꾸었지 뭐예요.

전 그이를 볼 때마다 왠지 남 같지 않은 생각이 들어
더욱 정이 가곤 하는 데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건 저 혼자 가슴 속 깊이 묻어둔 비밀이랍니다)
남몰래 혼자 좋아해서 다른 친구 뒤에 숨어서 훔쳐보곤 한답니다.
그럴 때면 제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살짝 붉어지곤 했던 것을
그이는 아는 지 모르는 지....

우리도 사랑을 하느냐 구요?
그럼요. 사람들은 아마도 모르겠지만
세상 모든 것들이 다 사랑을 하는 걸요.
강가의 돌들도 모래도, 숲 속의 벌레도, 깊은 밤에 우는 소쩍새도,
하늘의 별들까지도 다 사랑을 한답니다.

찬 서리 내린 가을달밤 풀벌레 소리가 유난히 곱다거나,
구름 속에 살짝 숨은 별이 유난히 초롱초롱 빛날 때는
틀림없이 사랑에 빠져있는 거랍니다.

사람들은 가끔 우릴 보고 신기해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한답니다.
겨울동안 헐벗었던 나뭇가지 어디에 어떻게 그토록 많은 잎들을
숨겨놓았는지......
아가가 그 조그마하고 귀엽고 예쁜 주먹을 펴는 것처럼
새순이 돋아나 연둣빛에서 초록으로 다시 짙어져 가는 녹음,
계절이 두 번 가면 노랗고 붉은 빛으로 물들어가고....

이젠 제 얘길 해야 할 까 봐요.

주인님은 사계절 어느 때고 귀여워하고 예뻐해 주신 답니다.
어떤 때는 밤이 이슥하도록 밭일을 하고 돌아오셔서
"하루종일 집 잘 지키고 있었니? " 하고 말을 걸어오시는 걸요.

뿌리에서 젖 먹던 힘을 다해 물을 빨아올리고 오뉴월 숨막히도록
뜨겁던 햇볕을 받아 들여 주황빛 열매를 맺고 낙엽이 물든 어느 날
푸른 하늘은 맑고 높아만 가고,
찬 서리 내리고 선들바람 부는 늦 가을날
주인님은 우리들이 그 동안 정성 들여 만든 과실을 거둔답니다.
이 기쁨이 차고 넘치는 좋은 날에 주인님 눈에 어리는 건
아마 자식과 손자들일 겝니다.

우린 이제 봄부터 우릴 붙잡아 주고 사랑을 주었던 나뭇가지를
아무 미련 없이 그만 떠나야 한답니다.
아무리 깊은 정이 들고 떠나긴 정말 싫지만 그건 자연의 섭리랍니다.
우리도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답니다.
어느 날 우린 장독대에 떨어져 쌓인답니다.
먼저 온 가까운 친구들도 있고, 바람결에 날아온 이웃집 친구들도 있답니다.

그 동안 아끼고 위해 주시던 안주인님은
이런 풍경을 참 좋아하시나 봅니다.
쓸어내지도 않고 겨울이 깊어 눈이 소복소복 쌓이도록 그냥 둔답니다.

우린 다시 돌아갈 겁니다.
밤새도록 내려와 쌓이는 달빛을 받고,
밤이면 세상에 내려오는 별들과 못 다한 얘기를 나누며
꿈꾸듯 지나간 날들 생각에 잠긴답니다.

논둑에서 멋진 화음으로 합창을 곧잘 하던 개구리 소리며,
개울물 졸졸졸, 콸콸콸 흐르는 소리며,
새끼송아지 꿈을 꾸는지 늙은 소의 뒤척이는 소리며,
부엉이며 뜸부기며 산비둘기며 이름 모를 풀벌레 울음소리며,
온몸을 흠뻑 적셔주던 빗방울 소리며,
긴 장마 끝에 반갑게 내리쬐던 햇살이며,
산 그림자 길게 늘이며 마을과 들녘을 온통 붉게 물들이던 노을빛이며,
새들이랑 양떼랑 산이랑 파도 같은 세상 온갖 모양을 만들어
우리를 심심치않게 해주고, 두둥실 떠가면서 시원한 그늘도 만들어주던
하얀 뭉게구름이며,
갑자기 몰려와서는 사방이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장대비를 쏟아놓고는 달아나던 소나기구름이며,
낯을 간질이던 소슬바람이며,
때론 다정하게 때론 소란스럽게 울어대던 매미와
우리 곁을 어지럽게 맴돌던 고추잠자리며,
골목길에 길게 드리우던 가을달빛이며,
밤이 이슥하도록 두런거리고 소곤거리던 얘기소리며,
이제 그만 놀고 들어와 저녁밥 먹으라고
애들을 부르던 엄마들의 목소리며......
남들이 다 깊은 잠을 자는 겨우내 밤늦도록 구슬픈 소쩍새 울음소릴 들으며
썩어 내가 떠나온 고향으로, 그 나무에게로 돌아갈 겁니다.

그리고 그 길고 긴 겨울밤 우린 꿈을 꾸겠죠.
시렁 위에 얹힌 우리 열매를 손주에게 꺼내주시며 우리 안주인님은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를 들려주실 겁니다.
창밖엔 밤새도록 눈이 내려서는 쌓이고
할머님의 옛날 이야기를 듣는 꼬마들의 눈은
별처럼 초롱초롱 빛날 거구요
동화 속 먼 나라를 다녀온 어린이들은
겨울동안 키도 마음도 훌쩍 자랄 겁니다.

이윽고 봄이 돌아오고 훈훈한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면
다시 어린 새잎으로 피어날 겁니다.
아마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이들은 눈치채셨을 겁니다.
전 덕유산 자락 작은 산골마을 뒤뜰에 사는 감나무 잎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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