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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층'은 누구인가


BY BKL386 2001-08-07

'기득권층'은 누구인가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양 정부의 공통점은 미상불 기득권층에 대한 공격이라 할 수 있다. "기득권층의 저항 때문에 개혁이 되지 않는다. " 아마도 지난 8, 9년 동안 가장 많이 들어온 말이 이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기득권층은 도대체 누구인가.

얼마 전 한 여당 연구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현정권의 정책기획에 참여하고 있는 한 교수 역시 '기득권층의 저항' 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썼다. 토론에 나온 다른 한 교수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기득권층이라 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발표자인 그 교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또 다른 교수가 되풀이해 물었는데도 역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왜 답을 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구나 그런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도대체 누가 기득권층인가.

영어로 기득권층은 이스태블리슈먼트(the Establishment) 다. 이스태블리슈먼트는 국가 내 주요 제도의 상층부를 점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상층부에 앉은 만큼 권력.재산.위신 등 사회적 희소가치를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동시에 사회적 혜택을 누구보다 가장 리얼하게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기득권층은 되지 않는다. 기득권층이 단순히 그런 사람들이라면 이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다 있다. 국가라는 제도가 존재하는 한 그 제도의 상층부를 점유하는 사람은 늘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기득권층은 어떤 사람들인가. 영어의 이스태블리슈먼트가 의미하듯 그 무엇이 '수립되고 확립돼 있는' 사람들이다. 그 '무엇이' 무엇인가. 하나는 역사성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성이다.

무엇보다 기득권층은 어제 오늘 생긴 것이 아니라 누대로 내려오는 역사적.전통적 기반이 있다. 그 역사, 그 전통 때문에 기득권층은 올드리치(old rich) , 올드하이(old high) 라는 별칭이 따른다.

'기득권(旣得權) ' 이라는 말에 부합할 정도로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묵은' 부자들이며 '묵은' 고관들이다. 조상 대대로 전습(傳習) 돼 오는 재산이며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 가장 가까운 조상이 할아버지 대이고 멀리는 십 수대의 선대까지 올라간다.

그런 의미에서 기득권은 내 능력, 내 의지로 획득된 것이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주어진 귀속적 지위며 귀속적 권리다.

그런 지위며 권리가 어떻게 그렇게 오래 지속될 수 있는가. 우리는 당대(當代) 를 버티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누대로 내려갈 수 있는가. 이유는 그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제 때문이다. 그들의 기득권에는 반드시 이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붙어 있다. 일반국민의 모범이 되고 지표가 되는 도덕성을 그들의 지위, 그들의 권리와 함께 지니고 있다.

우리에게 누대로 내려오는 그런 '묵은' 부자, '묵은' 고관이 있는가. 우리는 모두 당대의 부자들이고 당대의 고관들이다. 소위 말하는 뉴리치(new rich) 며 뉴하이(new high) 다. 우리말로는 벼락부자.벼락감투고, 한자어로는 졸부(猝富) .졸귀(猝貴) 다. 졸부.졸귀의 특징은 '무상한 이동' 이다.

덧없다 할 정도로 부의 이동도 잦고 자리의 이동도 잦다. 대재벌도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장.차관도 하루아침에 날아간다. 벼락부자.벼락감투에 붙어 있는 벼락의 특징이 그러하다. 벼락은 한 자리에 절대 오래 머물지 못한다.

벼락은 또 반드시 큰 변을 예고한다. "벼락맞는다" "벼락 떨어진다" 의 속언은 "큰 변을 당한다" 와 동의어다. 그래서 예부터 졸부귀불상(猝富貴不祥) 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갑자기 된 부자, 갑자기 쓴 감투는 모두 상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뉴리치.뉴하이는 있어도 기득권층은 없다. 그냥 엘리트층이며, 그냥 지배층일 뿐이다. 43시간 만에 날아가버리는 어느 장관 수명처럼 우리 상층부 사람들은 냉장고보다도 짧은 수명의 소모품이다.

그들이 어찌 기득권층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정치인도 운동권도 기성학자도 공격의 대상으로 기득권층을 올리는 것은 50~60년대의 서구인들을 흉내내서다.

옛말에 한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니 뭇개가 그 소리를 듣고 짖더라(一犬吠形 百犬吠聲) 하는 것과 같다.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없는 기득권층은 기득권층이 아니다. 함부로 기득권층이라는 말을 쓸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