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남편은 노래를 불렀다. 나이 50이 되면 이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로 가련다고, 도시에서의 삶이 아닌 새로운 농부의 인생을 살겠다고. 난 코웃음을 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한번도 서울을 떠난적이 없는 사람이다. 태어나길 서울 한복판, 그것도 삼일로가 생기기전 바로 그 아래에서 태어났단다. 그리고 40이 가까와 지도록..한번도 서울을 떠나 본적이 없는사람. 물론 수학여행이라든지, 여행은 해 보았겠지. 그런 그가 농부의 삶이라니.. 사고방식 자체가 그는 전혀 시골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소위 말해 남자에게 이런 말이 적용되는지 모르겠지만 서울깍쟁이.. 그리고 농부의 삶이라고?? 농부?? 그가 어찌 농부를 알겠는가? 그 투박하고 풋내나는 농부의 삶을 그가 어떻게 알고?? (사실 막연히 나도 만만치 않은 일이란걸 짐작만 할뿐..제대로 알고있는 것은 없다.) 그런 말을 할때마다 난 한마디씩 했었다. 당신 한번이라도 살아보고 그런 소릴 해라, 농부란게 뭐..고스톱치다 광팔아서 되는게 아니다.. 시골 사는게 그리 만만해 보이느냐..그렇게 좋으면 왜 전부 시골을 버리고 서울로 서울로 사람들이 올라오겠느냐..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갈수록 그의 노래는 그 곡조를 더해갔다. 남편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꼭 해내고야 마는...그게 그리 원대한 꿈이 아니고..생활속에서의 욕심.. 신혼을 저층 아파트에서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전철을 타고 가다가..그냥 그 저층아파트가 무척 예뻐 보였기 때문에, 그 아파트에서 신혼을 시작하길 고집했었다. 시어머니가 장래(?)를 걱정해 잠실에 아파트 하나를 계약해 놓은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고층 아파트에서 가지런히 빛나는 불빛이 너무 아름다웠다고. 고층아파트를 꿈꾸기 시작했고, 시댁 바로 앞에 허허벌판이 신도시로 변해 갈때쯤..그는 나를 신도시 모델하우스로 데리고 갔었다. 그렇게 허허벌판에 신도시 평촌이 들어설때 개구리 소리를 들으면서 입주를 했다, 그 곳에서 작은 아이를 낳고..그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때쯤.. 우린 7년동안 살던 그 곳을 떠나 남양주 마석이란 곳으로 이사를 왔다. 이 곳이 그의 삶에 대한 욕심의 끝일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아직 이곳은 할일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아마도 그 일들 속에 묻혀 다른 꿈을 꾸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쨋든 그의 소망에 따라 우린 도시를 떠났고 남들이 소위말하는 전원주택에 산다. 50이 되기전에... 우습게도 50이 되면,이라고 말하던 그가 50도 되기전에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이곳 별빛마을로 오게 된 것은 나의 부축임 때문이었다. 그가 50이 되면이라고 시작하는 노래가 거듭될 수록 나는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50이라.. 벌써 4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지금과는 천양지차일 그 때..내가 과연 새로운 환경에 적응 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 때가 되면 한창 공부할 아이들..머리통 다 큰 애들을 끌고 시골로 갈 생각을 하니 앞이 다 깜깜해 졌었다. 한켠에서 떠오르는 생각, 도시에서 거의 한평생을 살았지만 내 기억의 한 쪽에서는 항상 외갓집의 풍경이 그려지곤 했었다. 정서의 근원.. 푸른 논과 구불구불 한 길..논 가운데 서 계시던 할머니..그리고 끝도 없을것 같았던 마을의 뽕밭들.. 그런 기억이 오늘날의 내 정서의 바탕을 이룬만큼..나에게 있어 시골에 대한 기억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에겐.. 그러한 기억이 없었다는것. 아이들이 어릴때 외갓집에 데리고 가긴 했지만. 이미 세상을 떠나신 친지들 때문에 더이상 나의 외갓집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기는 불가능이었고 도시에서 내내 살아갈 내 아이들이 안타까웠던 것은 사실이었다. 해서 어느날 난 남편에게 말하고야 말았다. 당신..정말 시골에 가고 싶으면..아이들 한살이라도 더 어릴때 가자..우리 아이들의 기억속에 고스란히 남아..나중에라도..부모가 없더라도..고향처럼 깃들일 곳이 있도록..그러자면 아이들의 숨결이 그 공간에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냐고..꼭..엄마 아빠가..보고싶어서가 아니라도, 미치도록 오고 싶은 그런곳이 우리 아이들에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남편은 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을 하기에 앞서 남편은 항상 책부터 섭렵한다. 집짓기에서부터 시골에 적응하면 사는 선구자(?)들의 조언과 경험이 들어있는 책들을.. 그리고 시간만 나면..용인 이천 양평등 서울주변의 지역들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그런 곳엔 땅값이 오를대로 올라있는 상태여서 포기 해야만 했고. 그리고 아직 남편은 직장을 포기 할수는 없는 입장이라 서울까지의 출퇴근을 감안했어야만 했다. 또 처음 집에 대한 생각은 기존 마을에 있는 농가주택을 싸게 구입해서 그것을 고쳐서 살 생각을 했지만. 남편이 결정적으로 단지로 조성된 주택단지를 생각한 것은, 바로 남편이 읽었던 책들마다 조언을 했던 시골 사람들의 외지인에 대한 경계와 텃새라고 하는 것 때문이었다. 사람살이에 번거로움을 싫어하는 그는 결국 직접 기존 마을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살아야 하는 농가주택을 포기했고, 어차피 도시를 떠나 시골에 살겠다 생각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그런 곳을 택하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전원주택 단지였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곳이 바로 이곳 별빛마을이다. 수동쪽의 전원주택지를 찾아가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 전원주택 단지로는 처음으로 입주자모임이 형성되었다는 곳이었다. 땅이란 것도 사람과 같이 첫눈에 반하는게 있는 모양이다. 글쎄.. 난 이곳이 첨에 그리 맘에 들진 않았다. 무엇보다 주변환경이.. 내게 있어서 전원이란 농촌이었다. 축구장 잔디처럼 넓디 넓게 펼쳐진 논들과 그 사이에 흐르는 물.. 논 사이로 자전거를 끌고 다니는 아이들.. 가끔..논에서 피를 뽑아내는 노인들..그 노인들 얼굴 속에 함께 있을 할머니의 얼굴도. 아스라히 작은 점으로 나타나서 차차 모습을 드러내던 사람들이 모습..그런 것이 내게 있어선 전원이었다. 외갓집의 기억이 온전히 농촌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한데..불행히도 나와 남편의 전원에 대한 기억은 엄청나게 다른 것이었다. 남편의 아버지, 즉 시아버지의 고향이 강원도 평창이시다. 가도가도 산뿐이었던 첩첩산중, 남편이 어릴때 두번인가 가 보았다던 아버님의 고향..그랬다 남편에게 있어서 전원은 바로 산안개 모락 모락 오르던 산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 곳 별빛마을은 남편의 그 기억속의 전원과 많이 닮은 곳이리라.. 내 의견이 왜 없었겠냐마는. 나의 수동적인 성격은..남편이 하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게 되었다. 말려도 안되는 것을.. 남편은 그렇게 이곳 별빛마을을 사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