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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사후피임약을 허용하라!


BY psymh 2001-09-03



2001.08.20.월요일
딴지일보

여자와 남자가 만났다. 왜? 좋으니까. 그리고 섹스를 했다. 이심전심으로 삘을 받아 충동적으로 했을 수도 있고, 아주 차분하고 용의주도하게 배란기를 체크하든, 콘돔을 썼든 어쨌든 섹스를 했다.



그런데 한 바탕 격정의 순간을 치른 후에야 문제가 있었음을 알 게 된다. 질외사정을 요구했건만 창졸지간에 남자가 실수를 했거나 혹은 뒤늦게 배란기였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아님 찢어진 콘돔을 휴지통에서 발견했거나.

아이를 갖고, 낳아 키울 상황이 아닌 이들은, 아니 여자는 이제부터 무얼 해야 할까? 불안하고 초조하게 다음 생리를 기다리다가(이때의 불안감을 누가 알랴? 남정네들 태국가서 콘돔 안끼고 그짓한 후 에이즈면 어쩌나 걱정하는 기분?)임신테스터기로 자가 진단도 해보고 다행히 임신반응이 안나타나면 가슴을 쓸어내리지만, 그렇지 않다면.. 낙태, 미혼모, 남자의 배신.. 뭐 이 따위 시나리오가 쓰여질 것이다. 좀더 경험이 있는 여자였다면 문제가 있음을 알자마자 죄인의 심정으로 동네약국을 숨어 다니며, 정체불명의 사후피임약을 조제해줄 것을 애원했을 것이다.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도 모르고..

만약에 성관계 후 바로 약을 먹으면 충분히 임신을 막을 수 있으며, 부작용도 거의 없는 사후피임약이라도 약국에 있었다면 이 여자의 임신공포증과 그로 인해 엉클어진 생활, 완전히 망가질지도 모르는 미래는 소설 속 야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약이 있었다.



썰들의 주인공이닷!

최근 우리 사회에서 시판허가 문제로 종교계, 여성계, 청소년보호위원회, 의학계 등이 나서서 시끌벅쩍 말들이 많은 노레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시판 허가를 반대하는 이유는 엄청 많다. 이 약이‘성적인 문란’을 야기한다는 썰, 생명을 경시하게 만들 거라는 썰, 가뜩이나 여성에게 가중되고 있는 피임과 임신의 책임 소재가 더욱 더 심해져 궁극적으로 여성을 더욱 억압할 거라는 썰, 이 약을 손쉽게 구할 수 있으면 그렇지 않아도 막무가내로 섹스를 하는 남자들이 콘돔을 안 써서 에이즈나 매독이나 뭐 그런 성병들을 여자에게 옮기는 걸 막을 길이 없다는 썰.. 등등.

그러나..

이 속에 여자들의 이야기가 없다. 여자의 성에 대한 고민이 없다. 대저 약이라 함은 가장 아픈 사람이 먼저 필요로 하게 되어있고 그 약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을 중심에 두고 말들이 오고 가야하는데, 지금은 기가 막히게도 윤리니, 종교니 이런 우아한 말잔치만 화려하다. 그러하기에 필자는 여성을 중심에 두고 딴지의 지면을 빌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지난 7월 30일 주요 일간지들은 일제히 위와 같은 기사를 실었다.


노레보가 성적인 문란을 야기할 거라구?

어느 분께서 농담이랍시고 말씀하시길, 우리나라에서 이 약이 시판되면 아마 이름이‘놀아봐 정’이 될 것 같단다. 사람들은 와~ 하고 웃는데, 필자는 웃을 수 없었다. 이미 그 양반은 이 약이 시판되면 성이 문란해질 거라구 미리 상정했으니까 이름을 갖고 유치한 개그를 생각해냈겠기 때문이다.

문란이라 함은 도덕, 질서 따위가 흐트러져서 어지럽다는 뜻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성적인 문란이라하면 남녀가 아무 때나, 누구하고나 마구 섹스한다는 뜻일 터.



자기 이거 쓸줄 알쥐~?

정말 그럴까? 이 작은 알약이 나오면 갑자기 사람들이 섹스하느라 미쳐 돌아다니게 될까?

지금은 콘돔이 거의 생필품처럼 쓰여지고 있는 세상이지만, 처음 콘돔의 사용법을 성교육과정에 넣자고 했을 때도 성문란 이야기가 나왔었다. 몇몇 교사들이 그럼 애들이 콘돔을 믿고 마음껏 섹스할 거라구 길길이 날뛰었다. 지금 와서 생각한다면 웃다가 턱빠질 소리지만 그때는.. 분명 그랬다. 불과 수년 전 이야기다.

그런데 콘돔이 거의 풍선껌처럼 돌아댕기는 지금, 콘돔으로 인해서 성이 문란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남자는 여자에게 주머니에 콘돔있으니까 한번 하러 가자고 말하는가? 그러다간 미친놈 소리 들을 거다. 콘돔 때문에 임신 걱정이 없으니 남녀가 아무나 만나, 아무 때나 막 자게 되나? 독자들은 그러는가? 좋겠군..

노레보의 성문란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똑같이들 청소년들을 걱정한다. 물론, 그들의 주장에서 청소년들이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가능성은 필자도 동감한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솟구치는 성욕을 이기지 못해 괴로워 하는 아이들에게 어쩌면 노레보는 자기 충동을 쉽게 발산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고 하는 소리다. 실제 우리나라 200만 건의 낙태 수술에서 청소년과 미혼녀의 비율은 20% 남짓이고 70% 정도가 기혼부부 사이에서 터울 조정과 경제적 문제로, 그리고 남아선택출산에 따른 여아 낙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20%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청소년의 낙태 문제와 노레보를 운운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스스로 절제를 잘 하는 학생들은 알아서 잘들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학생들이 정말 걱정이 된다면, 차리리 예방교육으로서의 성교육을 강화해야한다. 콘돔쓰는 법을 가르쳐주고 애들 캠프갈 때 콘돔챙겨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이라는 것이 단지 쾌락의 도구가 아닌 인격적이고 총체적인 성인의 결합이며,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어릴 때부터 가르쳐 줘야 한다. 그렇게 예방교육을 철저히 하면서 또 한쪽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임신을 했을 때 해결할 대책을 준비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마약환자 치료할 때 약도 주고 마약도 주는 것처럼.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무작정 막거나(막는다고 안하냐), 쉬쉬하는(그러니까 비디오방에서, 여관에서 하지)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된다.

각설하고, 이 사회는 아직도 여러 부분에서 남성주도적이다. 성을 문란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거개가 성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남자들이지 여자가 아니다. 한 번 섹스하는 것으로 짧으나마 쾌락을 느끼는 것도 남자임은 물론이다. 쾌락은 커녕 욕 들어먹을까봐 노심초사, 임신할까봐 애면글면 하느라 여자들은 성문란해지고 싶어도 불가능하기 일쑤다. 만약 이 약이 시판되고 그래서 여자들도 좀 맘놓고 문란해질 수 있는 세상이면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노레보가 여자들을 뻔뻔하게 만든다?

이 약이 너무나 간단해서, 섹스하고 나서 그냥 한 번 먹고 다시 한 번 먹으면 되니까, 여자들이 임신하고 낙태하는 것에 대해 죄의식조차 느끼지 않을 거라는 말이 있다.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노래 카츄사처럼‘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대로 떠나가신’남자들에겐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가.‘맘대로 즐기시고’,‘임신하게 하시고’,‘낙태하게 하시거나’,‘미혼모로 만들어주시고’아니면‘지 귀중한 새끼가 외국으로 팔려나가도 죄의식 안느끼시는’그들에겐 무어라 말할 것이냐.

왜 여자에게만 낙태를 하게 되면 평생을 죄의식 속에 살라고 강요하는가? 그렇지 않아도 낙태한 여자들은 남은 인생 모두 죄의식 갖고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혹 FASS(First Abortion Stress Syndrom)이라는 말 들어보셨는가? 낙태한 여자들이 육체적 후유증보다는 정신적인 상처에 시달려 우울증에 정신이상, 자살까지 가는 정신질병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랴.

혹 조선시대처럼 원하지 않는 임신 때문에 양잿물을 한 바가지 들이켜고, 낭떨어지에서 골백번 구르고, 안되면 서낭당 큰 나무에 목을 매길 원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다면.. 그런 식의 조선시대 여성 잔혹사는 당신들 마누라에게 쓰게 하시라. 혹시 감쪽같이 이 약 한 알 지어먹고 죄의식도 없이 간단하게 임신을 피하고 순결한 모습으로 처녀인 척 하고 살까봐 겁이 나서 그런다면.. 그런 식의 요조숙녀 교육은 당신들 딸에게나 시키시라.

노레보는 낙태약인가? 피임약인가?

“난자와 정자가 수정하는 순간부터 수정란은 인간이다. 그러므로 임신은 수정되는 바로 그 시점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종교계와 낙태반대자)

“임신은 의학적으로 수정란이 자궁내막에 착상되면서 시작한다. 착상이 되는 시기는 난자와 정자가 만나 수정된 뒤 5∼7일 이후이다.”(의료계)
생명의 시작을 어디로 보느냐를 두고 벌이는 이 민감한 논란은 노레보 시판의 가장 뜨거운 쟁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부분은 과학자와 의학자, 종교계 보수주의자들이 이미 충분히 의견들을 나누었으므로 필자는 현실을 살고 있는 한 여성의 입장에서 견해만을 피력할까 한다.

필자는 그 분분한 의견 중에서 의료계의 주장에 동의한다. 72시간 이내에 써야만 효과가 있는 이 응급피임약은 생명을 죽이는 낙태약이 아니라 생명이 생기는 것을 피하는 약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낙태약은 RU486이라는 약이 따로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약은 섹스 전에 하지 못한 피임에 대한 응급 사후 피임약일 뿐이다.

그리고 생명을 경시하게 만든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마시라. 생명을 중시하는 것이야 남자보다 여자가 더할 수 있다. 우리 여성들도 낙태는 싫다, 생명이 너무 소중하다. 그래서 아이를 갖게 한 남자가 어떤 사람이건 간에 임신을 하면 그냥 낳았다. 그래서 단지 한 번 섹스했을 뿐인 아이 아버지한테 안고 간다. 소중한 생명, 우리의 결실이라고. 그때 우리의 아버지들은 어떻게 했는가? 생명을 중시하는 아름다운 여자라고 표창장이라도 줬던가? 표창장은커녕 내치지나 말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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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덜언 함께 할 준비가 되어있냐?

남녀가 공히 평등하게, 주체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섹스할 수 있는 사회를 우리 모두는 원한다. 피임의 가장 큰 목적은 준비가 되었을 때, 가장 원할 때, 임신을 하기 위함이지 다른 어떤 목적도 없다. 이 응급피임약으로 성문란이나 생명경시니 여성들만 이기적으로 행복을 추구한다느니 심지어 더욱 더 여자만 피임과 낙태의 책임감만 가중될 것이라는 말은 일리는 있으나, 당장 시급한 여성들의 임신과 낙태에는 그다지 도움되는 말이 아니다.

왜냐 하면 정부나 고상한 종교단체들이 우아를 떨며 탁상공론하고 있는 사이에도 여성들은 한 웅큼씩 되는 부작용 심한 피임약을 지어먹고, 수술대 위에서 마취주사를 맞고 있으며, 불러오는 배를 복대로 조인 채 울고 있으며, 화장실에 붙여진 불법낙태 시술자에 달려가 몸과 마음을 학대받고 있고 아기를 홀로 낳고 미친 년, 헤픈 년 소리를 듣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나온 아이를 붙들고 울다가 입양을 시키고 있으며‘미혼모’로 낙인이 찍힌 채 어둠 속에서 간신히 살아가고 있다. 시판을 허용해야 하는 이유는 이 만큼이나 자명하다.

남성들아. 지 몸 안에 있는 생명의 씨앗을 중시하고, 섹스할 때도 정말 안전하게, 가장 적절한 시기에 아기를 낳아 키울 상대와의 상황이 아니라면 책임감 갖고 피임해라. 그렇게 하고도 실수로, 임신이 염려될 때, 어쨌든 가장 절박하게 임신을 원하지 않을 때, 여성들이, 이 약을 쓸 수 있게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가난과 피임에 대한 무지와 주체성의 결여로 몸과 마음을 망치는 여성들을 위해 피임교육을 해 온 마거릿 생어의 말을 적을까 한다.

“어머니가 될 것인가, 되지 않을 것인가를 뜻대로 선택할 수 있기 전에는
어떤 여성도 스스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기자 '날마'
(michell369@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