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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좀 느긋하게,살게해줘.


BY 남자 아줌마 2001-10-30

<한겨레 21서 퍼옴>

아내가 박사가 되어 돌아왔다. 유학을 떠난 뒤 11년이 훌쩍 지났다. 기혼여성이 유학을 계속할 수 있다 하여 부러움을 사기도 했지만, 공부를 하는 데도 여자이기에 감내해야 했던 역경이 만만찮았다. 특히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느라 공부가 몇년 더 늦어졌다.
그동안 아내없이 아이를 키워온 나는, `이제 아내가 돌아왔으니 한시름 놓았겠군'하는 인사를 자주 받는다. 그러나 아내가 돌아왔다 하여 아이를 돌보거나 집안일을 하는 데서 손을 뗄 수 없으니 내가 하루 시간을 보내는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요즘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보고는 놀란다. 아내가 돌아온 뒤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다. 느긋함이 베여 있다. 그 느긋함은 아내와 함께 집안일을 할 수 있게 된 데서 생겨난 여유이다. 아내가 옆에 없었을 때 나는 집안일의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해야 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었고 내가 잘못하면 아이는 그 피해를 바로 입게 되었다. 나는 항상 긴장했다. 그리고 무척 바빴다. 자투리 시간도 아껴 못다한 일을 해야 했다. 직장일과 집안일을 하는 데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다. 그래서 일을 무리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둘러 일을 했고, 서둘러도 안되면 순서를 어기거나 적당히 빠뜨렸다. 눈치를 보거나 새치기를 하였고, 응당 해야 할 일도 핑게를 대며 하지 않기도 했다. 그 무렵의 굳어진 내 얼굴 사진을 보면 안쓰러워진다.

그렇게 살면서 아줌마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염치를 생각하지 않고 양보할 줄 모르는 아줌마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뜻한 바를 이루려 하는 아줌마들. 새치기와 무단횡단을 서슴지 않는 아줌마들. 나는 `남자 아줌마'가 되어 `아줌마 짓'을 스스로 하면서 아줌마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깨닫게 되었다.

아줌마들을 추상적으로 욕하는 남자들은 적반하장을 하고 있다. 아내가 돌아와 아내와 함께 집안을 꾸려가게 되어 느긋해진 나처럼, 험상궂은 얼굴을 한 우리의 아줌마들도 그들의 남편들과 함께 집안일을 하게 되어 더 느긋해지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면 세계적으로 알려진 `한국 아줌마'에 대한 프랑스 사전의 설명이 수정되는 날도 올 것이다. 우선 남편들 스스로 반성하여 실천해야 하겠지만, 아줌마들도 남편들에게 요구하자. “나 좀 느긋하게 살게 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