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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에서 만난 그녀


BY 나의복숭 2002-05-05

몸이 찌부등하여 목욕탕엘 갔었다.
요샌 목욕탕도 시설을 너무 잘해놓아서
왕년의 때벗기기 차원이 아니고 피곤할때 쉬어가는
놀이터 차원의 의미가 더 많은 장소로 변했다.
어디나 빈부의 차이는 있게 마련이지만
여기 발가벗고 들어온곳에도 분명히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빈부 차이는 눈에 확 들어날 정도로
표시가 난다.
척보면 안다.
조금 여유있는 사람은 열심히 맛사지도 받고
편안하게 들어누워서 내때를 남이 벗기게 하는데...
백수아닌 백조인 나 이도희는 언감생심 그런 팔짜는 물건너갔고
내힘으로 열심히 내때를 벗겨야 할 처지다 ㅎㅎㅎ

안개가 자욱히 낀 안개사우나 들어갔다가 냉탕에 들어갔다가
3200원 본전 뺄라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내 옆으로 약간은 안면있는 아줌마가 쓰윽 지나갔다.
사실 목욕탕에서 안면있는 사람 만나면 참 머쓱하다.
모른채 하기도 그렇고 아는체 하기도 시셋말로
참 쪽팔린다. ㅎㅎㅎ

스쳐 지나갔으니 다시 돌아볼 필요도 없고 하여
사우나안에 들어와서 누굴까 곰곰히 생각해도
이넘의 기억력이 요샌 까마귀고기를 먹었는지
영 깜깜하고 통 기억이 안났다.
내 천성이 워낙이 태평이라 기억안나면 악착같이
생각할려고 하는기 아니고 걍 넘어가는 성질이라
멍청하니 앉아 있는데....

문여는 소리가 들리드니 아까본 안면있는 아줌마가
작은 통속에 찬물을 넣고선 들어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추리며 시선을 돌렸는데 그녀가
나를 보드니 화들짝 놀라는거라...
우리 분명히 아는 사이가 맞긴 맞구나.
어디서 봤드라? 누구드라?
나를 본 그녀는 엉그추춤하다가 쳐다보는
내 시선과 마주치자 무안한듯 웃어보이며
'도희구나'
옆에 사람도 안들릴정도의 작은 소리로 말을하며
내 옆으로 왔다.
약간 저는 다리를 본순간 그때서야 내 기억이
끔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태숙이다.
그 옛날 태숙이 맞구나.
10년도 훨씬 더 된 기억속의 태숙이.
한때 얼마나 속상해하며 그녀를 욕하고 증오했든가?

그날
태숙이네가 밤도망 갔든날
난 뒷통수를 얻어맞을 정도로 놀랬고 앞이 캄캄했었지.
항상 만나든 친구.
그날 아침에도 그녀는 나에게 애가 갑자기
입원했다며 돈을 빌려갔었는데...
돈보다도 그녀의 철저한 배신에 치를 떨었다.
아니 돈때문에도 치를 떨었지.
.
내가 그녀를 믿고 빌려준 돈이 상당한 액수였었고
급기야 남편이 알게되어
그것때문에 내 가정생활에 한참 혼란이 왔어야했다.
그당시 부부 싸움의 단골 메뉴가 되기도 했으니...
내가 등신 같았는지
나를 속인 그녀가 교활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근데 그녀는 나의 오랜 친구였고
친구가 곤란할때 조금 여유있는 내가 걍 주는것도 아닌
빌려주는건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도망간다는건 꿈에도 생각못했다.
돈도 잃었고 덩달아 친구도 잃었다.
연락 않는 그녀를 보면서 언젠가는 연락할꺼라
한편으론 믿었지만....
그녀는 내 믿음을 철저하게 배신했다.
결코 연락하지 않았다.
치밀하고 빈틈없는 남편이 여기저기 알아봐도
작정하고 숨은 사람을 자신이 뭔 재주로 찾을수 있단 말인가?

배신감.
내가 이용당했다는게 더 분했다.
지구 끝까지라도 따라가서 붙잡고 싶었든 맘.
왜 그리도 감쪽같이 날 속였고 난 감쪽같이 몰랐을까?
당연했다.
그녀가 떠난후 그녀의 집이 이중 삼중 잡펴있었고
온 동네 사람에게도 돈을 빌렸고 여기 저기 돈때문에 그녀를
찾는다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으니...

그당시는 그리도 분하고 미웠지만 세월이 흐르니
그녀도 얼마나 괴로웠을까 이해가 되었고
증오는 애증으로 변했었다.
나도 나이를 먹은 탓일까?
언뜻 한번씩 그녀 생각이 났고 보고싶단 생각도 했다.
돈만 아니었으면.... 얼마나 다정했든 우리 사이였든가?
그래 혹시나싶어 아이 러브 스쿨이란데를 뒤적여 보기도 했다.
똑똑한 그녀가 컴퓨터를 모르진 않을꺼라 생각했으니....

'태숙아'
내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지금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때의 후덕하고 사람좋은 모습은 간곳없고
엄청 말라빠진 그녀를 보니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우리 둘은 분명히 나이를 먹었나보다.
손잡고 눈물이 그렁그렁한채로 한참을 쳐다보다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대충씻고 목욕탕을 나왔다.

트로이 메라이의 음률이 곱게 울려 퍼지는
아늑한 커피숍에서 조용히 울먹이며 말하는 그녀는
옛날처럼 차분하게 가슴아픈 얘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사업하든 그녀의 남편은 이세상 소풍끝냈는지
한참이 되었고 혼자 온갖 궂은일 하면서 딸들 공부를 시켰고
다들 출가시켰단다.
LA에 딸과 함께 살다가 옛시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임시 귀국하였단 그녀.
그녀의 옛이야기를 들으면서 난 울고 또 울었다.
그녀도 나도 그 옛날 돈 이야기는 꺼집어내질 않았고
미안하다 말하는 그녀의 눈빛하나로 난 그녀를 용서했다.
용서라면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힘들때마다 한번씩
미련을 가졌든 돈였기에...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주고 꼭 LA에 놀러오란 말을
끝으로 우린 헤어졌다.
참 인연은 끈질기고 사람의 운명은 알수가 없단
생각이 들었다.
건강하든 그녀의 남편이 고인이 됐다니 맘이 아팠고
날씨가 꾸리무리하면 그옛날 교통사고로 절든 다리가
더 아프단 소리에 가슴이 아렸다.
그래
세월은 다 용서가 되는구나.
어느면으로보면 지금은 나보다 훨씬 나은 처지의 그녀가
그래도 안쓰럽고 마음아픈건 내가 내 자신의 주제파악을
못하는 탓일까?
내일 다시만나자 약속해놓은 그녀가 왜 이리
보고싶고 기다려지는지 나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