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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백명의 외국여성과의 경험 바탕으로 성지침서 펴낸 배동한


BY 부자 2002-05-18

8백명의 외국여성과 성관계 경험 바탕으로 성지침서 펴낸
배동한

"파트너에 대한 배려가 최고의 테크닉이죠"
75년 미국으로 이민간 뒤 인종과 민족을 불문하고 수많은 여성들과 섹스를 나눈 배동한씨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섹스 지침서 <오 마이 섹스>를 펴냈다. 동양인 유일의 섹스사교클럽 회원으로 섹스예절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기도 한 배씨의 섹스인생 & 그가 말하는 ‘지속성 오르가즘’에 대한 이야기.

“나이 50줄에 들어서서 이런 책을 냈다고 욕하시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음지에서 몰래 숨어서 하는 섹스가 아닌 당당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그러면서도 서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올바른 성문화, 성 지식의 정착이거든요.”

미국에서 25년 동안 수많은 여성들과 섹스를 한 후 그 경험을 바탕으로 섹스지침서 <오 마이 섹스>라는 책을 펴낸 배동한씨(51). 그는 카사노바라 불릴 정도로 ‘힘(?)’이 좋지만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부모님의 속을 썩일 정도로 몸이 약했다고 한다. 친구들에게 매일 맞고 들어오는 것에 화가 난 부모님이 운동할 것을 강하게 권유할 정도였다.

“친구들이 몸이 약하다고 따돌리고 때리고 했으니 부모님이 얼마나 속이 상하셨겠어요. 더군다나 제가 장손이었거든요. 안되겠다 싶으셨는지 중학교 때부터 운동을 시키셨어요. 그래서 유도와 합기도를 배웠죠. 그렇게 운동한 것이 지금은 공인 5단이에요. 교내 복싱선수로 발탁되어 강원도민 체육대회에도 출전했고 유도대표선수로 전국대회에 출전하기도 했어요. 천성이 싸움꾼이었는지 운동을 시작한 후론 절대 맞는 일이 없었죠. 중학교부터는 줄곧 요즈음 아이들이 흔히 하는 말로 ‘짱’이었어요.”

외형상으로도 그는 51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몸이 다부졌다. 학창시절엔 여학생들이 그를 많이 따라서 여자친구도 4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때인데 친구들하고 놀이공원에 놀러간 일이 있었어요. 거기서 같은 또래 여학생들을 만났어요. 재미있게 놀고 날이 어둑어둑해져서 집에 돌아가려고 하는데 한 여자애가 할 얘기가 있다고 그래요. 잠깐 따로 보자고 해서 따라갔더니 느닷없이 키스를 하는 거예요. 당한 거죠 뭐, 허허. 순간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도망치듯 집으로 와 버렸어요. 도망치는데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고 온몸이 끓어오른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랬어요. 나중에 친구에게 들은 얘기인데 그 여자애가 저하고 섹스를 하고 싶다고 그러더래요. 아마 그때부터 이성과 섹스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 것 같아요.”

항상 주위에 따르는 여자가 많은 건 아마도 할아버지 영향이 큰 것 같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호색가였어요. 한의사였는데 여자를 좋아 하셔서 가산을 많이 탕진하셨죠. 어느 동네에 누가 예쁘더라 그러면 뒤도 안 돌아보시고 달려가시곤 하셨어요. 아마도 할아버지 내림인가 봐요.”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할 무렵 그는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한방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했다. 사춘기로 한창 예민할 때 ‘여자’라는 이성을 알게 된 그는 성에 관한 한의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성에 대한 한의학 서적들을 많이 봤어요. 그때 읽었던 책들이 제가 책을 쓰는데 도움이 많이 됐죠.”



천호동의 조폭집단에서 행동대장으로 건달생활 시작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는 서울로 올라갔다. 그의 아버지는 광업소 일이 남아 있었고, 동생들은 학교 관계 때문에 어머니와 단둘이 상경했다. 그가 서울 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은 천호동이다.

“처음 천호동으로 오니까 텃세가 심하더라고요. 이미 탄광촌에는 적수가 없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 텃세를 꺾으려고 일부러 ‘똘마니’들에게 시비를 걸었어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을 했죠. 그러니까 자기네 조직에 들어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들어간 곳이 당시 천호동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조폭집단이었어요.”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사고만 치고 돌아다니는 아들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그를 자동차공업사에서 일하는 외삼촌에게 보냈다.

“그곳에 가자마자 자동차 타이어 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잡다한 일을 시키더군요. 기술을 배우려면 이런 것부터 해야 하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몇달을 일했는데 정말 적성에 안 맞더라고요. 어떡할까 고민하다 삼촌 몰래 도망 나왔어요.”

다시 조직폭력배 생활로 돌아갔다. 그는 위에서 시키는 일을 오차 없이 악착같이 처리하여 다시 조직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행동대장이 되었다.

“원래 조직에서 행동대장은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아요. 애들 데리고 다녀야 하고 선배들 잘 모셔야 하고 또 업소 관리도 해야 하고 말이죠. 일 처리 잘한다고 선배들한테 인정받을 때쯤 여자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업소에서 관리하는 아가씨들하고 잠자리를 많이 가졌죠. 당시의 잠자리는 단순한 성적 쾌락이었어요. 잠자리를 많이 하다보니까 안되겠다 싶어 성기 단련도 많이 했고요. 요즘은 확장수술이다 뭐다 해서 광고가 많이 나오던데 그때는 그런 수술이 있을 리 만무했죠.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아무튼 별짓을 다 했어요.”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것일까, 그는 조직생활을 하며 유흥업소 일대에서 속칭 ‘어떤 여자가 죽인다더라’하는 소문이 들리면 듣기가 무섭게 달려가 그 소문이 맞는지 확인해 보곤 했다. 그래서 소문이 사실이면 ‘누님’이라고 부르며 적극적으로 그녀에게서 ‘여자들이 원하는 성’에 대해 배우곤 했다. 예를 들어 어떻게 자극을 줘야 여성이 오르가슴을 느끼는지 잠자리를 함께 한 여자들로부터 체험으로 배운 셈이다.


이민 후 첫 상대였던 백인여자

그렇게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의 인생에 변화가 생긴 것은 75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부터다. 미국에 있던 이모의 초청으로 온 가족이 갑작스레 이민을 가게 된 것.

“당시는 이민법이 까다롭지 않아 8백달러만 가지고 가도 됐던 때였거든요. 이민 초기엔 말도 안 통하고 음식도 안 맞고 정말 고생을 많이 했어요. 녹음기를 갖고 다니면서 미국사람들 하고 대화한 내용을 녹음한 후 하나씩 다시 들어가며 공부하면서 언어장애를 극복했죠. 친구가 없어서 외롭기도 했고요.”

그는 이민생활중 인종차별이 가장 참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번은 백인들과 총격전도 치르기도 했고, 그 일로 인해 폭력범으로 체포되어 재판까지 받게 되었다. 당연히 재판은 그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했을 터. 결국 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사고를 친 사람들이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면 우리나라의 집행유예 제도처럼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는 제도가 있었다. 결국 그는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생각지도 않았던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민을 오면서 온 식구들이 나서서 돈을 벌어야 했다. 배씨도 직업을 가져야 했지만 미국인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대화를 할 일이 많지 않고 묵묵히 일만 하면 되는 정원사 일을 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대학에 다니게 되어 공부와 직장생활을 병행해야 했다. 그렇게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던 무렵 그는 미국에서 첫번째 여성을 만났다.

“이모부가 미국 분이셨어요. 형제가 많았는데 그중에 저하고 같은 또래 여자아이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저하고는 사돈지간이죠. 제가 하도 외로워하니까 자기 친구라면서 소개시켜 주더라고요. 당시 스물네살 된 여자였는데 정말 영화에서나 봄직한 여자였죠.”

한참 외로울 때 그녀를 만나 주말이면 여행도 같이 가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우면서 아주 편안한 친구처럼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에게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을 했다.

“우리나라에서의 데이트는 영화보고 괜찮은 곳에서 저녁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녀가 망설이는 거예요. 처음엔 의아했죠. 나중에 알고보니 미국에서 데이트 신청은 섹스까지 포함이 된거라고 하더라고요.”

결국 그녀는 그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였고 그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술도 조금 마신 데다가 조명도 분위기 있고 더군다나 영화에서나 봤던 금발의 미녀가 옆에 있으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제가 먼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조명이 바뀌면서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너무 아름다운 몸매를 가졌더라고요. 수건을 벗고 제 옆에 누웠는데 흥분한 나머지 시작도 못해보고 끝이 나고 말았어요. 어찌나 민망하고 창피한지 그냥 옷 입고 ‘다음에 보자’고 간단히 인사만 한 후 허둥지둥 집으로 왔어요.”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너무 창피해서 그녀를 피했다. 마침 그는 미국인들과 회화가 가능할 정도의 영어 실력이 돼서 정원사보다는 좀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조선소 용접공으로 취직을 했다. 그렇게 한동안은 돈을 버는데 신경을 쓰고 있을 때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자기가 데이트 신청을 하겠다고 해요. 시간이 좀 지난 뒤였고 보고 싶기도 해서 승낙을 했죠. 그리고 그날 밤은 정말 황홀했어요.”

그날 이후 그녀와의 잠자리는 소문을 타고 이 여자 저 여자에게 전달되었다. 그의 테크닉이 소문이 난 후에는 섹스를 원하는 여자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얼마후 그녀의 소개로 ‘휴먼 보디 리서치’의 회원이 됐어요. 일종의 사교클럽인데 그 클럽은 원하기만 하면 회원 누구와도 섹스를 할 수 있는 곳이에요. 제 얘기를 사전에 들어서인지 대부분의 여성 회원들이 저와 섹스하기를 원했어요. 나중에 보니까 제가 여성 회원들 전부하고 섹스를 했더군요.”


나라별 인종별로 섹스 스타일도 달라

그는 미국의 4개주를 다니며 다른 주 사교클럽 회원과도 섹스를 즐겼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그가 관계를 가진 여성은 무려 8백여명. 그와 관계를 맺었던 여성들의 국적과 인종을 보면 정말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중남미 출신 여성과의 체험이 가장 황홀했다고 한다.

“백인 여성들은 분위기를 중요시해요. 시각적인 효과를 많이 강조하거든요. 예를 들어 은은하고 밝은 분위기에 조명이라든지, 깔끔하게 정돈된 침실과 섹스 전 둘만의 교감을 느낄 수 있는 와인이라든지 말이죠. 우리나라 여성들은 섹스를 하면 섹스에만 몰입하잖아요. 그런데 백인 여성들은 그렇지가 않아요. 성행위 도중이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많이 해요. 음악이 듣고 싶으면 음악CD를 가지러 가고, 특히 성행위 중에 맥주를 많이 마시는데 맥주를 마시고 싶으면 스스럼없이 중간에 가버려요.”

그는 남미 여성들의 경우 동양적인 정서가 많다고 한다. 한국 여성과 같이 수줍어하는 면이 많다는 것.

“남미 여성이 한국 여성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성적표현을 아주 정확하게 하는 편이라는 거예요. 애무를 하면 ‘어느 부분을 애무하는 것이 좋다’든지 ‘어떤 체위가 좋다’든지 의사표현을 확실하게 해요. 그리고 성행위할 때 율동이 아주 부드럽고 정열적이죠.”

그중에도 특히 브라질이나 볼리비아 여성들은 더 부드럽고 정열적인 섹스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다양한 여성들과 섹스를 하고, 또한 사교클럽 회원들과 이에 대한 장단점을 비교하고 토론하면서 섹스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갔다. 그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는 사교클럽 ‘휴먼 보디 리서치’에서 섹스예절학을 강의하고 있다고 한다.

“제가 책을 쓰면서 저의 과거를 전부 다 드러내 놓은 것은 이제 성의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실용성 있게 써서 책을 보는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싶어서예요. 그리고 남성이 군림하는 성행위에 대한 회의도 생겼고 말이죠. 성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거든요. 평생을 같이 해야 하는 거니까 소중하고 즐거워야 된다고 생각해요.”

배동한씨는 중앙일보 알래스카 지국장, 알래스카 인권옹호협회장, 공인 법정통역관, 앵커리지 경찰국장 자문위원 등을 지냈고, 현재 미국 시애틀에 거주하고 있다.





■ 글·김성호<자유기고가>
■ 사진·최문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