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300

원하는 것을 주자


BY 오정연 2002-05-20

함께 나누고 싶은 글입니다.^^
==================================
원하는 것을 주자!

글쓴이 : 장대 송종건(맑은샘심리상담연구소장)

결혼을 하기 전의 연인들과 결혼을 하고 난 부부들간의 차이는 뭘까 ?
결혼을 하기 전에는 서로 많이 사랑하는 것처럼 생각이 들다가 결혼을 하고 난 후에는 애정이 식었다느니, 마음이 변했다느니 등의 갈등을 겪는 기본적인 이유가 뭘까 ?

아마도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나름대로 자녀를 사랑한다. 그런데 그 중의 어떤 것들은 자녀에게 분명한 사랑으로 각인되고 어떤 것들은 사랑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 자녀들에게는 사랑과 관심으로 지각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간관계에 관한 각종 훈련과 부모역할 훈련 등에 관심이 있는 필자로서는 이러한 점들이 평소에도 궁금했었고 이 차이가 아주 중대하다고 생각해 왔다.

유아들의 장난감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장난감 통인데 윗 부분에는 각종 도형의 모양으로 난 구멍이 있다. 별 모양, 삼각형 모양, 원 모양, 사각형 모양, 반달 모양 등 각종 도형의 모양으로 구멍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모양에 일치하는 조각들이 있다. 그래서 유아들로 하여금 같은 모양의 도형을 같은 모양의 구멍으로 집어넣음으로써 도형의 입체감각을 학습시키는 장난감이다.

이 장난감의 가장 큰 특징은 같은 도형이 아니면 들어가지(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뜬금없이 장난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한 분도 계실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을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각자의 개인적 모양이 있다는 것이다. 이 모양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바로 그 사람이 사랑이라고 지각하는 독특한 모습의 필터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별 모양의 필터가, 또 어떤 사람에게는 원 모양의 필터가....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모양을 받을 때에는 사랑을 받고 있다고 지각하게 되지만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면 그것을 온전히 사랑이라고 지각하지 못하거나 지각한다고 해도 충분히 그 크기를 다 느낀다기 보다는 훨씬 적게 받아들여지거나 왜곡되어 지각된다는 말이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든다면 아이가 부모에게 계속해서 몸을 붙이고 얼굴을 쓰다듬는다든지 혹은 뽀뽀해달라고 조른다든지, 엄마 손을 잡고 손등을 쓰다듬는다든지 하는 행위를 할때 그 아이는 나름대로 엄마에게 사랑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엄마들 중에는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엄마도 있지만, 사랑의 필터가 다른 사람은 그것을 징그러워 한다든지, 귀찮아 한다든지, 부담스러워 하여 밀쳐낸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두 사람간의 필터의 차이, 즉 사랑을 느끼고 지각하는 개인적 모양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오늘날 자유를 위한 심리학으로 알려진 선택이론과 현실요법의 창시자인 윌리암 글래써는 바로 인간에게는 모두 개인적인 영역으로써 각자 좋은 세계(Quality World)를 가지고 있으며, 그 세계 안에는 각자마다 원하는 사진이 들어 있다고 주장했다. 각자가 원하는 사진에는 그만이 사랑으로 지각할 수 있는 각자의 모습들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게리 체프먼은 그의 저서 "5가지 사랑의 언어"를 통하여 사람들은 고유의 언어체계를 가지고 의사소통을 하듯 사랑을 전달하는데도 독특한 방식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사람들은 모두 사랑을 느끼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이 있다고 하며 자기의 사랑을 다섯 가지 방법으로 이해하고 전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섯 가지 방법 중에서도 가장 자신에게 맞는 제 1의 사랑의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이 제 1의 사랑의 언어를 다른 사람이 구사해 줄 때 사랑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또 그렇게 해줄 때 그들의 사랑의 그릇은 충분히 채워지고, 그들은 늘 안정감을 느끼게 되며 모든 면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가정에서 부모-자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부모들은 자기가 자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녀들은 늘 허전한 마음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곧잘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

게리 채프먼은 바로 이것을 사랑의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사랑의 언어 중 첫 번째의 것은 바로 육체적인 접촉이다. 이 육체적인 접촉이 제 1의 사랑의 언어인 자녀들은 부모에게 자주 안아달라고 조르며 뽀뽀해달라고 한다. 또 엄마나 아빠의 무릎 위에 앉으려고 애를 쓴다. 엄마 아빠의 손을 잡으려고 애를 쓰기도 하고 어깨를 둘르려고 하고 가볍게 두드려주기를 원한다.

육체적인 접촉이 제 1의 사랑의 언어인 아이들은 엄마 옆에서 괜히 접촉하려고 하고 누군가와 손 잡는 것, skinship을 좋아한다.
사랑의 언어 중 두 번째의 것은 바로 인정하는 말이다. 엄마나 아빠에게 혹은 그 밖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인을 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바로 인정하는 말이 제 1의 사랑의 언어인 아이들이 "엄마. 나 예뻐 ?", "나 어때 ?" 등으로 확인 받고 싶어한다. 또 인정해 주는 말을 하면 괜스리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인정하는 말이 제 1의 사랑의 언어인 사람들은 그들을 인정해 주는 말이나 행동에 아주 기분 좋아하고 한껏 사랑을 느낀다. 부부 지간에도 "당신 수고했어.", "언제 보아도 그렇지만 역시 당신이 최고야." 등의 말에 그간의 힘듬과 어려움을 잊어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세 번째의 사랑의 언어는 함께 하는 시간이다. 함께 하는 시간이 제 1의 사랑의 언어인 사람들은 항상 누군가와 함께 있기를 좋아한다. 별일 아니면서도 부모가 옆에 있어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랑의 충만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엄마 나 놀 때 옆에 있어주면 안돼 ?"라고 요구한다. 공부할 때도 별일 없이 옆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소일하는 부모를 좋아하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부부지간에도 토요일, 일요일 없이 밖에 나가서 업무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기 때문에 아주 싫어하는 이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그냥 옆에만 있어 주어도 기뻐하고 좋아한다. 옆에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사랑을 느낀다.

네 번째가 바로 선물이다. 아이나 어른이나 선물이 제 1의 사랑의 언어인 사람들은 비교적 보물상자를 가지고 있다. 그 속에는 그들의 추억이 담긴 선물들이 감추어져 있다. 언제 누가 선물한 것에 어떤 의미를 담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비싸고 값진 선물도 나름대로 의의가 있을 수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작고 싸고 그리 대단하지 않은 선물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으면 아주 귀하겨 여기고 좋아한다. "이 머리 끈은 아빠가 내가 ∼살 때 어디 가셨다가 사다 주신거야."라는 기억을 가지고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사랑을 음미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의 사랑의 언어는 봉사이다. 봉사가 제 1의 사랑의 언어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하여 무엇인가 해 준 것, 봉사 해준 것, 희생해 준 것에 큰 의미를 둔다. 예를 든다면 저녁에 늦게 끝나는 학교 정문 혹은 버스 정류장까지 꼭 마중나오는 부모에게 더 사랑을 느낀다던지, "당신을 위하여 ∼을 했어."라는 말에 감동을 받는 다던지 하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다섯 가지의 사랑언어들 중에서 각자에게 사랑으로 느껴지는 것이 꼭 하나는 아니다. 그렇지만 게리 채프먼에 의하면 누구나 이 다섯 가지 중에서도 각자마다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씩 존재하며 그 외의 다른 것들도 함께 좋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섯 가지의 사랑의 언어 중에서 제 1의 사랑의 언어는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충분히 채워줄 수 있을 만큼 강력하게 사랑을 전하지만 다른 것들은 사랑으로 충분히 느껴지기보다는 뭔가 모자라고 갈증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부모들이나 부부 지간에도 사랑을 꼭 자기 식으로 자기의 제 1의 사랑의 언어를 전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자기 마음같이 받아주지 못한다고 섭섭해하고 원망스러워한다. 사랑을 주고받는데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바로 그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다.

주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자기 식대로 주고, 받는 사람들도 자기 식으로 받기에 그 사랑이 충분히 오가지 않는 다는 것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결혼 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려고 애를 쓰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다가 정작 결혼을 하고나면 사랑을 주는 기초적 관점이 나에게로 넘어온다. 그래서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 가를 파악하려고 애를 쓰기보다는 내가 주고 싶은 사랑을 주려고 하기에 어찌보면 결혼 후의 많은 부부들이 서로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지각하거나 결국에는 갈등을 겪게 되고 어려워지기 쉬운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제는 생각을 조금만 달리해보자. 우리가 사랑을 줄 때는 나를 위해 주기보다는 그를 위해 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돌고 돌아서 결국에는 나를 위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긴 하지만 그 순간 사랑을 주는 것은 그를 위해서 주는 것이다.

기왕에 그를 위해서 주는 것이라면 그가 원하는 것을 주자. 똑같은 사랑을 전하면서 상대가 그 사랑을 받을 때 항상 기뻐하고 주는 크기 만큼 아니 어쩌면 더욱 풍성하게 받게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사랑을 주면서도 항상 상대로 하여금 갈증나게 하고 뭔가 미진한 것같은 사랑을 줄 것인가, 이는 바로 누가 원하는, 누가 바라는 사랑을 주느냐에 달렸다.

이제는 상대가 원하는 사랑을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