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공동회 방청기-서울시장 후보 3자토론-
진중권
'만민공동회'라고 하면 월남 이상재 선생이 생각날 것이다. 지난 29일 서울 종로의 YMCA 대강당에서는 수십 년만에 다시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이른 바 '서울시장 후보 검증 평가 유권자 만민 공동회', 서울 시장에 출마한 후보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공약과 정책을 검증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 초청을 받아 나온 민주당의 김민석, 한나라당의 이명박, 민주노동당의 이문옥 후보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패널들의 질문에 답하는 가운데 100명으로 구성된 '시민평가단' 앞에서 공약과 정책을 검증 받았다. 모임을 주최한 '서울 YMCA 유권자 10만인 위원회'는 이번 검증과 평가의 결과를 공개할 예정이며, 그 결과에 기초해 지지후보를 결정할지 여부도 대표자 회의를 거쳐 확정할 것이라고 한다.
행사가 열리는 강당에 들어가자 내부는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 열기가 후끈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단상에는 세 후보와 패널들이 앉을 책상이 마련되고, 단상 아래로는 100인의 시민평가단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행사장에 좀 늦게 도착한 나는 미쳐 자리를 잡지 못해 2층으로 올라가 간신히 계단 한 구석에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이날 행사는 인터넷을 통해 생방송으로 중계가 되기도 했다. 원래 SBS를 통해 방영이 될 예정이었으나 민주당 김민석 후보 측에서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공중파를 통해 방영되지는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이날 행사는 '만민공동회'의 유래를 설명하는 김수규 서울 YMCA 회장의 인사말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어서 각 후보가 인사말 겸 출마의 변이 있었고, 이때 민주노동당 이문옥 후보는 이번 행사에 사회당과 녹색평화당의 후보가 함께 초청받지 못한 데에 유감을 표명했다. 이번 행사에는 여론조사 최대 지지율이 3%인 후보만 초청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달리 이날 행사는 후보들 간의 토론회가 아니라 후보들의 정책과 자질을 검증하는 모임이라 다른 때와 달리 후보들의 표정에는 자못 긴장감이 흐르는 듯했다. 패널들이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어 질문들이 매우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패널들은 특히 후보들의 공약이 실현가능한 것인지 여부와 그 공약을 실현할 구체적 방안을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공격과 방어
평가와 검증은 모두 다섯 가지 항목으로 이루어졌다. (1) 공약이 실현가능하며 (2) 서울 YMCA가 제시한 정책 및 실천과제를 수용하고 있는가. (3) 개인의 도덕성과 청렴성에 문제가 없으며 (4) 시장후보로서 자질과 리더쉽을 갖고 있는가. 그리고 (5) 선거자금을 투명하게 운용하며 공명선거를 할 의지가 있는가. 하지만 3당의 후보가 모두 서울 YMCA에서 제시한 10대 정책과제 및 50대 실천 과제를 수용하겠다고 밝히는 바람에 세 후보의 공약에서 차별성을 찾기란 매우 어려웠다.
민주당의 김민석 후보는 패널들이 던지는 곤혹스런 질문에 특유의 화법과 세련된 매너로 비교적 무난하고 설득력 있게 대답을 해 나갔다. 공약의 내용을 제쳐두고 오로지 검증회 그 자체만 본다면 김민석 후보가 가장 매끄럽게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다른 후보의 공약과의 차별성을 각인시키는 데에는 좀 미흡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사회복지의 아젠다는 이문옥 후보에게, 청계천 복원은 이명박 후보에게 선점 당했기 때문이리라. 지하철 2호선을 따라 대학과 벤처기업을 묶는 산학협동의 구상, 인터넷을 통한 전자정부, 영어캠프의 설치 등이 기억에 남으나 뭔가 절박한 시민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명박 후보는 패널들에게 가장 많은 괴롭힘을 당했다. 곤란한 질문에는 번번히 "구체적 방안은 내일 인터넷을 통해 공개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넘어가, 다분히 선심성 공약을 남발한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었다. 다만 곤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특유의 여유를 보이며 가벼운 농담으로 웃어넘기며 긴장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순발력이 돋보였다. 특히 후보의 도덕성을 캐묻는 후반부에는 건축법 위반, 선거법 위반 전력 등을 거론하며 몇 년 전 주간지의 인터뷰 기사까지 들이대는 패널들의 집중 추궁을 받아 진땀을 빼는 모습이었다. 특히 175억의 소득자가 의료보험료를 만 오천 원 냈다는 점을 패널들이 다시 한번 거론하는 순간, 방청석에서는 그의 보이는 사람이 "그만 해라!"라고 고함을 지르다가 눈총을 받기도 했습니다.
민주노동당의 이문옥 후보는 어눌하면서도 질문을 피해가지 않고 정면으로 대답하곤 했다. 버스공영제의 실시에 따른 재원 확보 방안 등 곤란한 질문에 진보적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일단 진보정당이 정책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입증하는 데에 성공한 듯이 보였다. 다만 '용산미군기지 반환'과 같은 공약은 중앙정부에서 해야 할 일로 대선용 공약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었다. 후보들이 서로 괜찮아 보이는 공약을 베끼는 바람에 후보간의 차별성이 사라지는 상황에서, 이문옥 후보의 공약은 비교적 다른 후보들의 것과 분명히 구별되는 특징을 보였는데, 이 진보적 공약을 시민평가단들에게는 자칫 '급진적'으로 평가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증회 단상
전반적으로 패널들의 질문의 기조가 지나치게 중산층적 시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가령 "임대주택을 지으면 슬럼화되지 않느냐"는 어느 패널의 질문은 내게 매우 도발적으로 느껴졌다. 임대주택 있는 곳이 무슨 할렘과 같은 범죄소굴이나 된다는 얘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문제는 외려 임대주택에 사는 사람들을 무슨 상종 못할 하층민 취급하는 시민들의 중산층적 편견에 있다는 게 나의 인식이다. 이문옥 후보는 영구 임대주택 단지를 따로 조성하는 게 아니라 30평형의 일반주택과 섞어서 짓겠다고 대답함으로써 이 못된(?) 질문을 무사히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서민과 노동자를 대변하는 후보로서 그 질문의 계급성을 따끔하게 지적하고 넘어갔더라면 좋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널들이 이명박 후보가 내고 있는 의료보험료의 액수를 공개했을 때, 한편으로는 175억에 달하는 그의 '사적' 소유와 2만원도 안 되는 이 갑부의 '공적' 납부금의 현저한 콘트라스트가 내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가 위법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그의 문제가 아니라 175억의 자산가에게 2만원도 안 되는 돈을 의료보험료로 요구하는 제도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적이 과잉정치화한 우리 사회에서는 제도의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그저 한 사람에게 정치적 타격을 입힐 '껀수'로만 여겨지곤 한다. 패널들은 차라리 175억의 재산을 가진 이명박 후보에게 그 돈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적이 있느냐고 물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패널들이 김민석 후보가 민주당 내의 정풍 파동 때 보여준 태도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고 넘어간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울러 패널들이 김민석 후보가 제출한 지출내역서 하나 제대로 읽어내지 못해 허둥댄 것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전반적으로 김민석 후보에 대한 패널들의 추궁은 충분히 예리하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물론 김민석 후보가 말을 잘 하고 준비도 철저히 했기 때문이겠지만, 자칫 편파적이라는 오해가 생길 정도로 패널의 추궁도 예리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문옥 후보가 아들의 재산을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들이 공개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문옥 후보의 해명에 따르면 재산공개를 거부한 그 아들은 지금 전세를 살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아버지가 공직에 출마해도 그 때문에 자기의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하기는 싫다고 했다고 한다. 선거 때면 모든 후보들이 가족과 친지의 재산을 남김없이 공개하겠다고 나서는 판에, 이 조그만 일탈이 외려 내게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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