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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흔세살 여성의 '꿈 찾기 20년'


BY 이영란기자 2002-07-26

박사도 '여성'과 '나이' 앞에서는 박사가 아니다

올해 마흔셋의 이은주씨(가명)는 오늘도 책상 위 컴퓨터 앞에 앉아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대구에 사는 친정집에 맡겨 둔 아들(7세·유치원생)과 옆동 아파트에서 시어머니와 함께 있는 딸(4세)이 보고 싶지만 꾹 참아야 한다. 학술지에 게재할 논문을 곧 마무리해야 하고, 또 가을쯤 출판할 계획인 단행본 작업에 마음이 바쁘기 때문이다.

남들이 보면 논문에, 단행본 출판까지 한다니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은주씨는 그런 일에 큰 희망은 걸지 않는다. 그런 일들이 은주씨가 취업하는 데에는 그리 보잘 것 없다는 것쯤은 이미 오래 전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런 희망에 인생을 걸고 장래를 건다는 게 얼마나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절망에 빠뜨리는지도 이미 익숙해져 있다.
그럼에도 그런 마음의 다른 한켠으로는 20여년을 꾸어온 꿈이라 포기하지 못하고 오늘도 여전히 강의록도 챙기고 또 연구에 열중하고 있다.

이은주씨의 현 직업은 대학강사다. 각 대학들이 전임교수보다는 시간강사들에게 수업을 맡기는 비중이 증가하면서 상대적으로 전임교수직에 채용될 가능성은 그야말로 '바늘구멍에 낙타 지나가기'인데, 은주씨가 바로 그 '낙타'이다. 더욱이 '여성'과 '나이'라는 두 개의 혹이 붙은 낙타이다.

은주씨가 대학을 졸업한 지도 벌써 20년이 되었다. 학부에서 인류학을 전공하고 미국에 있는 알려진 대학에서 동일한 전공으로 석사와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그러나 현재 그녀의 공식 직함은 '대학 시간강사'와 사단법인 민간연구소의 '무급 연구원'이다. 보수는 없지만, 그나마 연구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은주씨의 '직업과의 전쟁'은 20년 전, 대학을 졸업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 때 성적은 최상위권이었고, 영어 실력도 뛰어났으므로 취직걱정 없이 원서를 넣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대기업, 국가 기관, 정보지 회사, 기자 등 시험을 치른 곳마다 면접시험에서 거절당했다. '여자여서', '너무 얌전하게 생겨서', '또 여자들은 결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등등이 이유였다.

헤아릴 수 없이 면접시험을 치르며 7년을 보내고 난 후, 마지막으로 택한 길이 유학이었다. 박사학위라도 있으면 이 모든 것들이 해결될 줄로 믿었다.

얼마 전 은주씨는 한 대학의 교수채용공고를 보고 응시했다. 그런데 서류들을 제출하고 난 뒤 들리는 이야기는 이미 그 자리에 들어올 사람은 내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지원하는 일이 몇 번째인지 헤아릴 수도 없어요. 이미 내정되어 있다는데요, 뭐. 여자, 남자가 지원하면 자연스럽게 가장은 남자라 생각하고 남자로 정하죠. 늘 그래왔거든요."

6년간 또 다른 인생의 목표를 걸고 갔던 미국의 대학원에서 은주씨는 세월도 잊은 채 책만 보며 살았다. 결국 6년만에 인류학 분야에서 석, 박사과정을 끝마쳤다.

95년 여름, 귀국해 어렵사리 구한 직장이 대학 시간 강사. 그것도 아침시간 한 강좌에, 출근시간이 두세 시간씩은 걸리는 곳이었다. 은주씨는 새벽부터 일어나 몇 번이나 차를 바꿔 타며 곧 오게 될 '안정된 그 자리'를 그리며 강의를 시작했다.

그 다음 학기에는 강의 자리가 두 군데 더 생겼지만 곧 몰아닥친 IMF구제금융 사태로 다시 한 강좌로 줄었다. 그나마 남자 강사들에게 한 자리라도 더 준다는 거였다.

그처럼 한두 학교에 출강하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한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가게 되었다. 경력이 인정되고 신분이 보장되고 또 연구소에 속한 신분으로 연구 프로젝트에 지원도 할 수 있다는 말에, 무급이었지만 더 생각해볼 여지가 없었다.

그런 은주씨에게 이젠 '나이'라는 장애물이 하나 더 붙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은주씨에게는 성차별이 '만년 강사'와 '무급연구원'을 옭아매고 있는 큰 이유였으나 이젠 나이라는 '정당한' 구실 하나가 더 붙었다. 그런데 이 역시 유독 '여자'박사들에게만 걸림돌이 된다고 한다.

"일정 나이가 넘으면 지원하는 것조차 힘들어요. 그러니까 우리 여자들에게는 여자, 나이 모두가 취업의 장애물이죠."

최근 발표된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현재 전체 4년제 대학에 재학중인 여학생 비율은 39% 이고, 여성 박사 학위 취득자는, 국내박사의 비율이 24%이며, 해외박사는 22.9%가 여성이다. 이에 비해 대학에서 차지하는 전임강사 이상의 여자교수의 비율은 국립대학의 경우 9%, 사립대학의 경우 16%에 지나지 않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교육인적자원부에서는 올해 하반기 국공립대 신규임용부터 '여성교수 채용목표제'를 도입할 예정이라고 발표했지만, 그 역시 얼마나 현실성을 발휘할지 알 수 없다.

20대 초반에 대학을 졸업하고, 첫 7년 동안 취업전선에서 뛰다가 새 꿈을 찾아 다시 6년을 유학생으로 보내고 귀국한 후 7년째 그 꿈이 정착할 보금자리를 찾고 있는 은주씨.

"지난번 원서낸 학교요? 안 되었죠. 거기도 면접한 사람들이 다 남자교수였는데요, 뭐. 지금에 와서 다른 분야에는 더 갈 수 없죠. 대학도 안되는데 이 나이에 다른 곳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어요. 힘들어도 될 때까지 지원해봐야죠."

그가 떠돌이 삶을 정착하고, 20년간을 준비해온 새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이륙할 활주로를 찾을 수 있을지….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박사'들도 '여자'와 '나이' 앞에서는 박사가 아닌 현실. 이씨의 꿈이 나는 활주로 찾기가 이씨 혼자만의 일이 아닌 이유이다.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