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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애비를 용서해라


BY 플로렌스 2002-08-27

무능한 애비를 용서해라
조정래

아들아, 너는 요즈음의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무척이나 말수가 적은 너는 그저 속생각을 곱씹으며 이 애비를 원망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아버지는 맨날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라고 하셨는데, 그래가지고 요런 세상을 어떻게 살아나가겠어요, 하고 말이다.

애비는 최근에 들어서야 너한테 큰 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얼마 전에, 요새 세상에서 자식들에게 착하고 정직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부모가 가장 무능하고 무책임한 부모라는 말을 듣고 비로소 깨달은 바가 있었다. 단재 신채호나 만해 한용운을 꼽으며 너에게 삶의 바른 길을 잡아주고자 했으니 이 애비의 무능과 무책임이 얼마나 큰지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아들아. 5년 전의 악몽을 또 되씹지 않을 수 없는 너에게 이 애비는 참으로 면목이 없구나, 이 애비가 얼마나 무능하고 못났으면 무녀독남인 너를 현역으로 군대에 보냈더란 말이냐, 완전 면제는 아니더라도 18방·12방·6방이 줄줄이 있는데. 그러나 아들아, 이해해다오. 그건 이 애비만의 무능이 아니라 할아버지로부터 대물림된 무능이니 어쩌겠니. 할아버지는 네 아들을 모조리 군대에 보낸 최고의 무능력자였거든.

5년 전 어느 대통령 후보의 두 아들 모두가 군대에 가지 않은 의혹으로 세상이 시끌시끌해졌을 때, 너는 군대의 무조건적 구타로 얻은 목디스크를 몇년째 치료하고 있었다. 그때 너는 말 한마디 없이 그 요란한 정치싸움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 후보의 두 아들 면제 시기가 너의 신체검사 시기와 거의 비슷해서 이 애비의 무능은 더욱 도드라졌다. 이 못난 애비는 그 무능을 덮으려는 듯 그 후보를 욕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그 사람이 낙선한 것은 그 의혹 때문인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다. 그때 이 애비는 너에게 면체면은 한 것 같아, 그래도 세상은 살아 있다고 위안을 삼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시 대통령 후보로 나서자 면제 의혹은 새롭게 세상을 시끌시끌하게 만들고 있다. 여하튼 그 사람은 여러 모로 유능하기 그지없다. 이 못난 애비는 그 유능을 한없이 부러워하면서, 네가 다시금 지난 악몽에 시달리게 될까봐 마음 졸이고 있다.

아들아, 그런데 얼마 전에 애비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어느 대학생 모임에 강연을 갔었는데, 물론 이 애비는 정직하고 진실하고 대의를 위해 살라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강연을 한 것은 뻔하지. 그런데 강연이 끝나자 한 학생이 말했다. 만약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대학생들은 군복무 거부 운동을 전국적으로 일으키겠다고. 대통령의 아들들이 군대에 안 갔는데 왜 우리가 군대에 가야 하느냐고. 그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 생각은 기발했지만, 대답하기는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었다. 이 애비는 뭐라고 응답했을 것 같으냐. 아무 말도 못하고 손만 저었다. 이 애비는 참으로 무능하고 무능할 뿐이었다. 그 대학생의 말에 찬동하자니 나라가 망할 판이고 그 후보를 미리 사퇴시키자니 아무런 영향력도 없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권이 사회개혁을 내세우며 제일 먼저 한 일이 박정희 시절의 ‘안가’를 부수는 일이었다. 그때 국민의 지지도가 90%를 넘었다. 그 여세를 몰아 개혁 대상으로 삼은 것이 병역 비리였다. 어림잡아도 5만 건이 넘는다는 그 부정을 ‘단호히 척결’하겠다고 김영삼 정권은 기세등등했다.

그런데 그 수사는 흐지부지 덮이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 조사를 철저히 했다가는 나라가 망할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이 이른바 이 나라의 지도층이라고 하는 정치계·법조계·행정계·경제계에 몸담고 있는 위인들이었다. 이 애비는 그 유능한 사람들 축에 들지 못했으니 그 무능이 용서받지 못하게 크구나.

아들아, 너도 결혼해서 아비가 된 지 두 해. 너도 네 아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지 차츰 고민하게 되겠지. 어쩌면 너는 이 애비의 무능에 질려 유능한 교육을 혁명적으로 실시할지도 모르겠구나. 미안하다, 이 무능한 애비를 용서하거라.

조정래/ 작가·동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