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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 급한대로 헬기 4~5대를 지원해달라고 그렇게 간곡하게 요청했는데 아직도 안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시 예산으로 민간 회사에 헬기 임차계약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5개 마을이 나흘째 완전 고립돼 있는 등 사상 최악의 태풍 피해를 입은 김천시 박팔용 시장은 지난 2일 오후 시청을 찾은 전윤철(田允喆) 경제부총리에게 “당장 식수와 의약품 취사도구를 지원하려 해도 고립지역에 접근할 방법이 없다”며 몇 차례에 걸친 헬기지원 요청을 외면한 정부의 무대책을 따졌다. 김천시는 박 시장의 항의성 발언 이후에야 헬리콥터 4대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태풍 피해 지역들의 다급한 지원 요청에 대한 정부의 복구 대책이 늑장 일변도로 일관하고 있다. 여기에 대규모 수해를 겪어 본 적이 없는 시·군 등 지자체의 우왕좌왕까지 겹쳐 수재민들의 고통이 극심해지고 있다.
3일 현재 전국 26개 시·군 41만 여 명이 물 부족을 호소하고 있으나, 정부는 소방차 167대와 생수업체에서 지원받은 1.8ℓ들이 생수 4760상자 등을 지원했을 뿐이다. 군인·경찰관·공무원 7만4500여명을 피해 복구에 동원했지만 이들은 도로·교량·철도 등 복구에 매달려 민간 피해 복구에는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하는 실정이다. 강릉시청 직원 김 모씨는 “3일까지 중앙정부에서 도착한 구호품은 하나도 없다”며 “정부에 구호품 요청을 하면 며칠 내로 보내주겠다는 말만 한다”고 전했다.
강릉시는 지난 2일 낮 이근식(李根植) 행자부장관 현장순시 당시 응급복구비 90억원을 지원 요청했으나 3일까지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한 상태이다. 청와대가 수해 지역을 특별재해지역으로 선포키로 결정한 것도 이미 ‘루사’가 전국을 휩쓸고 지나간 지 나흘이 지난 3일에서였다.
정부 부처끼리도 손발이 어긋나고 있다. 행자부는 올해 재해 예비비로 배정된 1조3000억원을 지난달 초 집중호우와 제14호 태풍 ‘라마순’ 피해 복구비용으로 대부분 써 버린 상태. 이근식 행자부장관이 2일 수해대책마련을 위한 정부·국회 간담회에서 “2조~3조의 추경예산 편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자, 장승우(張丞玗) 기획예산처 장관은 “정확한 피해실태 집계가 나와야 추경예산 소요액 규모를 알 수 있다”며 유보적인 견해를 취했다.
강원 동해시는 2일 강원도 재해대책본부에 굴삭기와 덤프트럭 등 중장비 74대를 요청했다. 그러나 3일 오전 도착한 것은 굴삭기 1대 뿐이었다. 동해시청 관계자는 “강원도에 이유를 물었더니 ‘피해 지역마다 지원 규모를 어떻게 배분해야 할지 조율이 덜 끝났다’는 답변이 왔다”며 “지금 책상에 앉아 숫자놀음 하고 있을 때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정부는 수해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자 국고에서 지원되는 사망·실종자 위로금과 침수주택수리비 등을 지방예산에서 우선 지원토록 했다. 그러나 강원도청 관계자는 “피해조사가 끝나야 돈이 지급되기 때문에 결국 수재민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피해지역 주민과 공무원들은 “수해 피해조사 과정이 복구를 더디게 하는 큰 요인”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공무원들은 가옥의 경우 전파(全破)·반파(半破)·단순 침수 여부를 현장에서 반드시 확정지어야 한다. 가옥 손실 상태에 따라 지원금액이 1채당 2700만~60만원으로 엄청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농경지도 유실인지 매몰인지에 따라 보상 액수가 달라지므로 현장에서 결정해야 한다. 이런 절차를 거쳐야 복구작업이 시작된다. 도청 관계자는 “이 때문에 수재민과 담당 공무원이 복구는 뒷전이고 현장에서 멱살잡이까지 벌이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말했다.
수해 지역 주민들은 태풍이 몰아닥치던 31일 오후 초기 대응부터 늑장 일변도였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김천시는 31일 오후 7시 각 지역방송국에 주민 대피하라는 자막 방송을 요청했다. 그러나 주민 이명종(42·김천 황금동)씨는 “우리 동네는 오후 6시 이미 침수되면서 전기가 끊긴 상태여서 수재민들은 TV를 볼 수도 없는 상태였다”며 “방 안으로 폭포처럼 물이 밀려든 뒤 화급히 피신했다”고 말했다.
강릉시 회산동 심재국(沈在國·64)씨는 “31일 밤 동네가 물바다가 된 뒤 2층 건물에 대피해 있다가 물이 다 빠지고 스스로 나올 때까지 경찰이고 공무원이고 한 명도 못 봤고 안내방송도 없었다”며 “관공서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늑장으로 일관해 분통터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