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코미디 10선 [오마이뉴스 펌]
(1) 이승만과 대통령과 '울보장관'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자유당 시절 국무회의를 주관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실수로 방귀를 뀌자 한 눈치 빠른 장관이 했던 말이다. 문제는 그렇게 아부를 잘 하는 사람들이 이승만의 총애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승만 정권에서 한때 요직을 차지했지만 그에게 쓴소리를 했다가 미움을 받고 야당으로 발길을 돌린 신익희, 조병옥 등은 각종 '정치공작'과 '테러행위'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반면에 이승만의 총애를 받은 신성모 국방장관은 이승만 앞에만 가면 눈물부터 흘려 '울보장관'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렇게 눈물을 잘 흘렸던 신성모가 거창양민학살사건과 백범김구암살사건 등 무시무시한 범죄행위를 저지른 의혹의 책임자로 지목 받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2) 기상천외한 '반올림' 개헌
1954년 11월 27일.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철폐하자는 자유당의 헌법개정안이 국회에서 표결에 부쳐졌다. 투표 결과 재적 203명 중 가(可) 135표, 부(不) 60표, 기권 7표가 나왔다.
개헌을 위한 의결정족수는 136표. 1표가 부족해 개헌안은 부결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이틀 후 자유당은 기상천외한 주장을 들고 나와 부결 선언을 번복하고 개헌안 가결을 선포했다.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명인데, 소수점 이하의 숫자는 1인의 인간이 될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반올림)하면 203명의 3분의 2는 135명이 된다. 그러므로 개헌안은 가결된 것이다."
당시 그런 엉뚱한 '수학 논리'를 제공한 당사자들이 다름 아닌 서울대 수학과 교수들이라는 소문이 떠돌면서 국민들은 더욱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3) 테러에 대한 새로운 개념
1955년 9월 14일 오후 4시 25분. <대구매일신문>이 곤봉과 해머로 무장한 20여 명의 극우단체 청년들의 습격을 받았다. 신문사에 난입한 그들은 닥치는 대로 기물을 때려부수고 윤전기에 모래를 끼얹는 한편 이를 제지하는 신문사 간부를 곤봉으로 내리쳐 얼굴을 피범벅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승만 정권의 경찰은 벌건 대낮에 도심에서 펼쳐진 이 야만적인 테러사건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놀라지 마시라! 이 사건으로 먼저 구속된 것은 엉뚱하게도 신문사 주필이었다. 그리고 경찰 간부는 이 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들에게 이런 명언(?)을 남겼다.
"백주(白晝)에 행해진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
(4) 4·19혁명 배후에는 김일성이 있다?
4·19혁명 당시 실제로 있었지만 지금까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이다. 부정선거에 반대하며 데모를 벌이던 학생들이 경찰에게 학살되자 국민들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권은 이를 만회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꼼수'를 썼다.
우선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학생의 호주머니에 '이승만을 죽여라'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쓴 삐라를 집어넣었다. 신문은 이를 검증 없이 보도해 학생시위에 북한이 개입한 것처럼 여론을 호도했다. 경찰은 사람을 매수해서 데모 학생들이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는 거짓 증언을 하도록 조작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데모대가 파출소에 던진 돌이 북한에서 가져온 돌이라는 '기발한 의견'을 보고서로 제출하기까지 했다.
이 '믿어지지 않지만 사실로 밝혀진 이야기'는 <월간조선> 1983년 4월호 297쪽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5) 친일은 3대가 흥하고, 항일은 3대가 망한다.
대한민국 제헌의회가 출범하자마자 '반민특위'를 구성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것이 친일반민족 행위자를 역사의 법정에 세우고 민족정기를 바로 잡기 위한 조치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승만과 그가 비호하던 친일세력의 강력한 태클에 걸려 반민특위는 깨지고 만다. 특히 반민특위의 수배를 받고 있던 친일파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면서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가 끊기기는커녕 더욱 악화되었다. 우선 다카키 마사오(古木正雄)로 창씨개명을 했던 대통령 자신이 독립군을 사냥하던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 그런 출신성분을 가진 박정희의 비호 속에서 일제시대 조선사편수회에서 한국사를 왜곡하던 장본인이 문교부장관과 국사편찬위원장이 되고(이병도, 신석호), 친일인사들이 독립유공자가 되거나 그 심사위원이 되었다(조연현, 모윤숙, 유진오).
이로써 "친일(親日)을 하면 3대가 흥하고, 항일(抗日)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블랙 코미디' 같은 이야기가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현실로 굳어지게 됐다. 최근 한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부친이 조선총독부 검사국 서기 겸 통역생으로 부역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친일논란에 휩싸인 것도 이런 '유구한 전통'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6) 지역감정 조장하니 출세가도 달리네
1963년 대선과 1971년 대선에서 잇따라 '망국적 지역감정'을 조장한 인물이 있다. 앞에서 소개했던 김두한 의원의 똥물세례사건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이효상이 바로 그 장본인이다. 양대 선거에서 그가 했던 발언 요지를 보면 각각 다음과 같다.
"대구는 신라 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지만 임금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 고장 출신의 박정희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 임금님으로 모시자."(1963년) "호남에서는 이번 선거에 야당을 뽑을 것이므로 영남에서는 몽땅 여당을 뽑아야 한다."(1971년)
더욱 가관인 것은 이 발언 이후 도리어 이효상이 출세가도를 달렸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1963년 선거 당시 교육자 출신이던 그는 입당한 지 얼마 안 되던 무명의 정치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얼마 후 국회의장에 오르는 등 박정희 정권 하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이념'으로 조국이 남북으로 분단된 것도 모자라 또다시 '감정'으로 동서를 반 토막 낸 공적(?)을 높이 평가받은 것이다.
(7) 김 기자, 장군님의 뒤통수를 때리다
1980년 전두환 장군이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권력을 틀어쥐기 시작하자 수많은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들이 그에게 줄을 서기 시작했다. 당시 <경향신문> 기자였던 김길홍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4회에 걸쳐 '새역사 창조의 선도자 전두환 장군 시리즈'를 연재했는데, 이 '신판 용비어천가'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위 상임위원장의 고향은 물의 흐름과는 달리 남에서 북으로 역곡하는 지세의 한복판이라 해서 예로부터 큰 인물이 난다고 전해오고 있다…30년간 땀이 밴 정든 영예의 군복을 벗고 이제 용약 구국의 최전선에 뛰어들었다…정의감에 투철한 이념집단과 새시대 주도세력의 뒷받침을 받고 있으며 또 스스로 청렴결백한 천성을 지녔다."
그 기사 덕분이었을까. 김길홍 기자는 1982년 청와대 언론담당 2급 비서관, 2년 후엔 1급 비서관이 된다. '장군님의 은총'에 힘입어 그는 이후 전국구와 지역구 국회의원(민정당)에 당선되는 등 정계에서 승승장구한다.
그러다가 1990년 민정, 민주, 공화 3당합당에 동참하면서 김영삼의 신한국당에까지 몸담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날이 왔다. 1995년 말 김영삼이 전두환을 법정에 세우기 위해 신한국당 의원들에게 5·18특별법을 의원입법으로 제정하도록 지시한다. 물론 김길홍 의원도 이 법안에 서명한다.
그로써 '장군님이 손을 봐야 할' 배은망덕한 인물은 하나 더 늘어났다.
(8) 누가 '맹구'고 누가 '영구'인가?
김영삼 전 대통령은 4년을 사이에 두고 한 인물에 대해 극단적인 평가를 한 적이 있다. 전두환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 부산에서 잇따라 총선에 출마한 허삼수 후보에 대한 평가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마치 냉탕과 열탕을, 지옥과 천당을, 악마와 천사를 아무런 고민도 없이 하나로 보는 것과 같았다.
우선 그는 1988년 총선 당시 민정당 후보로 출마한 허삼수를 가리켜 "광주학살과 5공비리 등을 저지른 부정적 인물이니 절대 찍어서는 안 된다"고 부산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그 덕분이었을까. 고졸 학력이 전부인 무명의 인권변호사 노무현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노무현이 김영삼의 '3당야합'에 동참하지 않자 1992년 총선에선 전혀 상반된 주장을 펼쳤다. 노무현과 맞선 민자당 후보인 허삼수를 가리키며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해온 훌륭한 분이니 꼭 찍어달라"고 호소했던 것이다.
더욱 웃기는 것은 4년 전과 전혀 상반된 주장에도 불구하고 부산 시민들이 이번에는 허삼수를 당선시켰다는 사실이다. 그 정치인에 그 유권자라고나 할까. 아니면 '영구'와 '맹구'가 '봉숭아학당'에서 조우한 것으로 봐야 할까. 한국정치의 적나라한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놀라운 궁합(宮合)의 현장이 아닐 수 없었다.
(9) '준비된 대통령'인가 '멍청한 대통령'인가
김대중 대통령은 색깔논쟁과 지역감정의 덫에 걸려 세 번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진 불운한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1997년 그는 정권교체를 염원하는 민심에 힘입어 마침내 3전4기에 성공한다.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역대 정권의 잘못을 '반면교사'로 삼아 그들과 정반대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것도 물론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대선 직전에 가신(家臣)들이 임명직 공직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김대중은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상대적 장점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김영삼 정권의 전철을 밟지만 않아도 성공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세간의 전망도 있었다. 더욱이 본인 스스로 '준비된 대통령'임을 누누이 강조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임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현재 김대중 정권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 물론 남북문제나 경제문제에서 그가 상대적 우위를 보인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들의 국정농단으로 무너진 김영삼 정권을 반면교사로 삼겠다던 그가 두 아들의 비리로 도덕적 권위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정말이지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철이도 해 먹더니, 홍삼트리오는 또 뭔고."
지난 40년 동안 양김(兩金)과 함께 울고 웃던 국민들은 고소(苦笑)를 금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허탈한 웃음'이었다.
(10) 한나라당이 발간한 <2002년판 버전 홍길동전>?
현재 가장 유력한 대선 주자인 이회창 후보를 둘러싼 각종 논란도 '초절정 하이 코미디'의 진수라 아니할 수 없다.
이회창이 누구인가? 대법관, 선관위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 등 고관대작으로 활약하던 시절 엄격한 '법치주의'와 '원칙주의'를 주장하며 대통령의 권위에까지 도전함으로써 '대쪽'으로 불렸던 인물이 아닌가. 그러나 최근 속속 드러나고 있는 두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은 그가 평소 주장했던 '법치주의'를 무색하게 만들고도 남는다.
이회창이 대통령과 정당 총재들을 향해 작은 오류와 실수라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맞장을 뜨면서 국민들로부터 "오빠 멋있어"라는 칭송을 받던 바로 그 무렵, 그의 두 아들은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56가지의 의혹을 양산해내며 병역을 면제받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특히 '이회창 후보의 장남' 이정연이 보유한 키 179cm와 몸무게 45kg의 '환상적 조합'이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록은 과거 세계 코미디계를 석권했던 '홀쭉이와 뚱뚱이'를 연상케 한다.
더욱이 한나라당이 방송국에 공문을 보내 이정연이라는 이름 앞에 '이회창 후보의 장남'이라는 관형어를 넣지 말라고 압력을 행사한 것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홍길동군을 생각나게 한다.
따라서 한나라당이 야심차게 발간한 <2002년판 버전 홍길동전>(?)은 한국정치가 마침내 이룩해낸 코미디의 정수이자 압권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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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코미디보다 더 웃긴 한국정치 걸작시리즈 10선'을 살펴봤거니와,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물론 "웃으면 복이 온다." 그러나 한국정치가 선사한 웃음이 주로 '불쾌한 웃음'이었고 '저질 코미디'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코미디언 이주일의 타계를 계기로 한국정치가 보다 양질의 웃음, 생산적 웃음, 행복한 웃음을 국민에게 선사하기 위해 배전의 노력을 기울일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마지막으로 이주일 선생의 명복을 빈다.
* 이 글은 필자가 지난 8월 30일 CBS '변상욱의 시사터치'에 출연해서 방송했던 '정지환의 인물파일'을 정리한 것입니다. 방송내용은 CBS 인터넷 홈페이지 AOD에서 다시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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