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의 교훈 (퍼온 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제국주의 세력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착각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순진한 착각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되새겨보아야 할 사건이 있다. 그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9년 6월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Saadam Hussein)의 초청을 받은 미국 경제사절단이 바그다드를 방문했다. 이란-이라크 8년 전쟁이 1988년에 끝나자, 이라크는 미국에게 전후 경제복구 지원을 요청하였고, 그 요청에 따라 미국 경제사절단이 바그다드에 나타난 것이었다. 미국의 경제사절단은 투자자문회사 '키신저 협회'와 트러스트 뱅크, 모빌 오일 같은 미국의 거대기업과 은행 중역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국 경제사절단은 이라크에 투자하기에 앞서서 두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이라크가 대외채무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조건과 채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이라크의 국영 석유산업을 민영화하라는 조건이었다.
8년 전쟁으로 경제가 피폐해진 이라크로서는 대외채무를 해결할 길이 없었고, 더욱이 국영 석유산업을 민영화하여 미국 석유회사들에게 헐값으로 넘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라크의 국영 석유산업을 민영화하라는 미국의 요구는 미국이 투자해주겠다는 구실을 내걸고 이라크의 석유산업을 장악하려는 야욕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라크로서는 미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미국은 이라크가 자국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라크에게 제공하기로 약속했던 23억 달러의 차관마저 동결했다.
이라크는 경제위기에 빠져 들어갔다. 경제위기에 몰린 이라크에게 미국이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는 길은 이라크 경제를 지탱해주고 있는 마지막 버팀목인 원유수출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이 방해공작에 일종의 '미끼'로 동원된 나라는 이라크에 인접한 작은 나라 쿠웨이트였다. 미국의 사주를 받은 쿠웨이트는 갑자기 원유수출을 늘렸다. 산유국들의 국제기구인 석유수출기구(OPEC)는 국제시장에서 원유값이 폭락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산유국들의 원유 수출량을 제한하는 국제적인 합의조치를 취해 왔는데, 쿠웨이트가 그 합의조치를 파기하면서 원유수출을 갑자기 증가시킨 것이었다. 그러자 1990년 7월에는 국제시장에서 원유값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의 원유수출 증대조치로 이라크가 순식간에 1천4백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라크를 비롯한 석유수출기구 회원국들이 쿠웨이트의 합의파기행위를 비난했지만, 쿠웨이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석유수출기구와 이라크는 쿠웨이트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쿠웨이트는 그 협상제안마저 거부했다. 영토와 인구가 얼마 되지 않는 소왕국인 쿠웨이트가 이처럼 안하무인 식의 돌출행동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배후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힘의 정체가 미국이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라크-쿠웨이트의 원유분쟁은 이렇게 미국이 이라크의 원유수출을 방해하는 공작을 숨겨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이라크는 미국으로부터 차관도 얻지 못하게 되었고, 원유수출도 힘들게 되자 대외채무를 갚기는커녕 차츰 식량마저 수입하기 힘든 경제파탄에 몰렸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게 된 이라크에게 남아있었던 타개책은, 쿠웨이트를 군사적으로 점령하여 원유를 적정가격으로 다시 수출할 수 있도록 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90년 8월 2일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침공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기 직전인 7월 27일에 이라크 주재 미국 대사 글래스피는 사담 후세인과 비밀회담을 하였다. 그 회담에서 글래스피는 이라크-쿠웨이트 원유분쟁이 미국의 국익과 관계가 없으며, 따라서 미국은 앞으로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해도 묵인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믿고 후세인은 엿새 뒤에 쿠웨이트를 침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은 결국 미국의 교활한 '침공유도작전'에 속아넘어가 사면초가의 궁지에 빠진 꼴이 되고 말았다.
첫째,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기습적으로 침공하여 쿠웨이트 왕족을 인질로 잡겠다는 군사작전을 전개했지만, 쿠웨이트 왕족은 미국의 국가정보기관으로부터 침공 정보를 미리 전달받고 이미 나라 밖으로 도피한 뒤였다.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점령작전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둘째, 미국과 영국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기습적으로 침공하던 때에 맞춰 1천억 달러가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이라크의 해외자산을 압류하였다.
셋째,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점령했으나 점령작전의 목적을 달성하기는커녕 침략자라는 악명을 뒤집어쓰고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다.
넷째, 이라크는 이른바 '다국적군'을 동원한 미국의 집중적인 군사공격으로 엄청난 인명손실을 입었고 전 국토가 파괴되었다. 미국은 1990년 11월 29일 유엔을 동원하여 쿠웨이트 점령군을 철수하라는 통첩을 이라크에게 전달했고, 이듬해 1월 18일에 이라크에 쳐들어갔다.
1991년 당시 곤경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이라크는 쿠웨이트 침공작전 직전에 있었던 미국과의 비밀회담 기록을 세상에 공개하였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은 침공을 유도한 미국의 기만전술에 넘어간 실책이었음을 폭로하려는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대통령 부시는 그 문서가 날조된 것이라고 부인했다. 그로부터 1년 뒤에 미국 연방의회는 그 문서가 날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부시의 부인발언이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났다.
사담 후세인은 미국의 전면적인 공격 앞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자,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철수하는 조건으로 두 가지 조건을 미국에게 제시하였다. 퇴각하는 이라크군을 미군이 공격하지 말라는 것과 이라크를 침략자로 비난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상의 항복선언이었다.
그러나 이라크의 항복선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떤 소녀가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군이 쿠웨이트 종합병원 산부인과 병동의 조산아 보육기(incubator)에 들어있는 갓난아이들을 집단 살해하는 만행현장을 목격했다고 폭로함으로써, 이라크의 항복선언은 무효화 된 것이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항복선언과는 무관하게 계속되었고, 1991년 2월 28일 미국이 일방적으로 정전을 선포하기까지 이라크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집중포화를 맞고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런데 훨씬 뒤에야 세상에 밝혀진 것은, 갓난아이 살해 현장을 목격했다고 폭로함으로써 이라크의 항복선언을 무력화시켰던 그 소녀는 쿠웨이트에 주재하였던 미국 대사의 딸이었으며, 그 소녀가 언론에 폭로하였다는 것도 날조극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오늘 이라크 인민들이 겪고 있는 참담한 현실은, 제국주의 세력의 본성은 침략이라는 사실을 날카롭게 일깨워주고 있다. 제국주의 세력의 공격은 피에 굶주린 맹수처럼 포악하고 야만적이며 집요하고 교활하다. 제국주의 세력이 일단 어떤 대상을 침략하기로 정하면, 무슨 구실을 내세우고서라도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만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서 드러난 것처럼, 제국주의자들이 침략전쟁을 도발할 때는 기만, 사기, 협잡, 날조가 동원된다. 저들의 침략은 정치적 압박, 외교적 고립, 경제적 수탈, 군사적 공격으로 전개된다. 여기에 사상·문화적 침탈이 가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이라크의 고통과 비극은 미국의 일방적인 정전선언으로 끝나지 않고 봉쇄·압살정책으로 이어졌다. 미군 공군은 이라크 영공에 이른바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였고, 미군 해군은 이라크 영해에서 해상 봉쇄작전을 전개하였으며, 미군 육군은 이라크 접경지대에 2만명의 병력을 배치하였다. 1993년, 1998년, 1999년에는 이라크에 폭격을 퍼부었다. 미군의 공습은 지금까지도 때때로 이어지고 있다.
10년 이상 이어진 봉쇄·압살정책으로 기진맥진한 이라크의 앞날에는 불행하게도 더 처참한 파국적 종말이 다가오고 있는지 모른다. 지금 부시 정부는 봉쇄·압살정책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신음하고 있는 이라크에게 이번에 쳐들어가면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완전히 점령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이라크는 미국의 제2차 침략전쟁을 피해보기 위해서 미국에게 정치협상을 재개하자고 간청했으나, 2002년 8월 3일 미국 대통령 부시와 국무장관 콜린 파월(Collin L. Powel)은 "그 동안 이라크의 태도에서 변한 게 없으므로 정치협상은 필요 없다, 미국의 이라크 정책은 이라크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사담 후세인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라고 거듭 밝히면서 이라크의 간청을 일축하였다. 오늘 이라크가 경험하고 있는 고통과 재앙은 제국주의 침략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피의 교훈이다.
그런데 이라크의 고통과 비극을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오판은 미국의 군사전략이 어떻게 수행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무지의 소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