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물과 웃음 둘 다 존중한다. 내가 사람들을 웃기는 것은 웃음의 공허
함을 통해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고민하게 하기 위해서다. 또 내 노래는 다분
히 슬픔과 절망이 녹아 있지만 나는 인간의 눈물 뒤에 오는 카타르시스를 통
해 희망을 전해주고자 한다. 나는 내 노래 앞에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다.
노래할 때 나는 늘 경건했고 처절했으니까."
그의 공연이 이벤트 위주인 것은 노래를 빛내기 위한 최대한의 팬서비스다.
어느 누가 밤하늘의 별을 노래한다고 공연장 천정에 별을 만들어 붙일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에게도 무명시절은 있었다
비교적 유복한 집에서 태어난 그였지만 어머니의 연이은 사업실패로 그는 숱
한 고생을 해야했다. 야채장사, 공사장 막노동에 시계외판 그리고 DJ생활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고등학교를 퇴학당하고 가출했을 때는 너무 외롭고 힘들어 자살을 시도한 적
도 있었다. 다행히 주위사람들에 의해 발견돼 겨우 목숨을 구했다.
그는 91년 가수로 데뷔한 이후 정말 많은 공연을 해왔다. 하지만 최근 5년간
공연 전회 매진이란 기록을 세우기 이전까지 라이브 공연의 달인인 그도 설움
으로 일관된 무명시절의 터널을 통과해야만 했다.
92년 4월 그가 대학로 충돌 소극장에서 첫 장기콘서트를 열었을 때였다.
둘째날 1회 공연에 올라갔는데 5명의 관객이 앉아 있었다. 그것도 초대장을
받고 온 관객이 3명이었다. 아직도 그 날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런 상황은 말로만 들었지 직접 내가 당하니깐 무척 당황되었다. 공연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지만 나도 프로인데 단 1명의 관객이 있더라도 노
래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런 상황은 계속되었다. 나중에는 만성이 될 만
큼. 어떤 관객은 무대에 선 그 자신보다 더 민망해했다. 그런 날에는 언제나
관객들에게 술을 사다 주었다. 관객을 취하게 한 후에야 노래를 부를 수 있었
다.
"지금 나도 황당하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언젠가는 오늘 일을 웃으며 얘기
할 때가 오겠지요."
그가 사람들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웃길 수 있었던 것은 그때 두꺼워진 얼굴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소문나 버린 그의 왼손
어머니가 목사인 가정환경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이웃의 아픔에 관심이 많았
던 그는, 경기도 성남과 부천의 '푸른학교'와 '새소망의 집', 서울 사당동
결식아동모임 등을 돕고 있다. 지난 4월엔 경기 성남 상대원 시장에서 하루
종일 봉사기금 마련을 위한 자선바자회에서 다리품을 팔기도 했다. 홈페이지
(www.kimjanghoon.com)에 wenson's 라는 봉사방을 만든 건 공동체문화, 서로
돕는 문화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wenson's 라는 참으로 은밀하게 진행되어야 할 일을 내가 떳떳이 드러낸 건
내 웃음과 내 공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회의 어두운 면을 함께 고민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나느 제대로 울어 본 사람만이 웃음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고, 또 웃을 수 있는 사람만이 남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내가 보여준 슬픈 노래들과 익살스런 공연을 모두 좋아하는 사람
들과는 남을 돕는 정서도 함께 공유하고 싶었다."
wenson's 가 자금과 인원 동원에 차질 없이 상설기관처럼 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그는 대학축제에 초대될 때마다 받는 돈으로 자립기금을 마련하고 있
다.
그는 또, 지난해 레코드회사에서 받은 전속금 10억 원과 그동안 공연을 통해
번 2억 원을 합쳐 경기 일산에 청소년 문화원이 딸린 10대들의 교회를 지어
사회에 기증했다. 방황하기 쉬운 10대들을 위해 뭔가를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
은 가수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꿈꿔온 프로젝트였다. 고교 시절, 극심한 방
황을 겪었던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팬들로부터 편지를 받을 때마다 그들
만의 공간을 마련해주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가치관의 혼란으로 갈등하고 고민하는 청소년들에게 인생의 소중한 의
미를 일깨워주고 세상 속에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각종 프로그램을 구상
중이다. 기존의 교육방법을 탈피한, 그의 전공인 대중문화와 연계해 청소년들
이 흥미를 가질만한 아이템들이다. 그의 꿈은 빠른 시일 내에 청소년 복지회관
을 건립하는 것이다. 큰돈을 벌어서 크게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져왔던 그
는 최근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큰돈은 아무나 생기는 것이 아니고 기회는 미루다보면 끝내 오지 않는다.
적은 돈이라도, 작은 것이라도 지금 당장 봉사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바로 그
것으로 시작하라." 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wenson's 가, 한 명이 1백만 원
내는 것보다 100 명이 1원씩 내는 모양으로 성장하길 원한다.
비워진 그릇을 다시 채우기 위해
편한 웃음과 노래를 들려줄 것 같은 그가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남기로 예약
된 건 아니다.
그는 지난 5년 동안 4장의 앨범과 5백여 회의 공연을 가졌다. 늘 이벤트가
풍성한 공연을 하다보니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준 시간이었고, 그래서 더 이상
남아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공연을 하면 할수록 소진된 자신으 그릇을 다시
가득 채우기 위해 본격적으로 배워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서 그는 공
연의 본고장 뉴욕에 가 무대연출을 배우고 돌아올 생각이다. 그를 볼 수 있는
것도 올 연말까지만이다.
"하다하다 바닥까지 보여주고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충분히 사랑받고 있을
때 떠나야 돌아와서도 떳떳할 것 같다. 2년쯤 계획하고 있는데 그때는 노래든,
공연이든, 그리고 사회봉사든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른손을 깁스한 채로 공연하는 자신이 서글퍼질까봐 이참에 아예 풍자와 해
학을 가미했다는 구사일생 콘서트. 음악을 위해서라면, 팬들을 위해서라면 자
신이 희화화도는 걸 조금도 꺼리지 않는 그. 봉사활동 하는 건 팬들에게 '멋
진 오빠'로 보이고 싶어서라는 그의 장난기 어린 말이 그를 대표하는 것 같지
만, 미국 장갑차에 치인 여중생들의 유가족에게 성금 5백만 원과 직접 쓴 위
로편지를 전한 것을 한 사람의 가수 김장훈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인터뷰 . 임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