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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여인에게 쓰는 편지


BY mbc7906 2002-10-25

드림위즈(dreamwiz.com) 의 코뮤니티 '드림칼럼' 중
칼럼명 <생활의 발견>에서 퍼온 글입니다. 실연당한 여성들이
한번 읽어볼만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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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었습니다.
당신의 가슴 속으로 가을은 소리없이 찾아왔습니다.
길을 걸어갈 때, 몇장의 낙엽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포물선을 그리는
걸 바라보면서 당신은 "아, 가을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혼자서 걸어야 하는, 그래서 조금은 허전한 당신은
가을여인입니다. 가을여인에게는 적당한 고독이 필요합니다.
그 고독은 약간의 쓸쓸함을 동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견딜만합니다.
정동의 한 카페에서 한잔의 커피를 마시며 당신은
지금은 떠나버린 옛사랑에 대한 추억을 음미할지도 모릅니다.

그 남자는 가난했지만 꿈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당신은 그 남자에게
인생을 걸기로 했었지요. 그가 시험공부에 매진할 수 있도록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에게는 장밋빛 미래가
보장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남자는 의지가 약한
사람이었고 어느날 "너를 위해 떠난다"는 짤막한 편지를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졌지요. 백방으로 찾아보았지만 그는 완벽하게
숨어버렸지요. 그는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했고, 당신한테 더 이상
짐이 되기 싫어서 떠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게 당신한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 그 통속적인 궤변이 당신을 얼마나 슬프게 했나요?
그가 떠난 이후로, 당신의 가슴 속에는 다른 남자를 받아들일
공간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떠났지만, 당신은 그를 보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신이 앉아있는 카페의 유리창밖으로 은행나무가 보이고
창백한 은행잎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내립니다.
**********숲은 공허하게 녹이 슬어
가지에 붙어있는 단 하나의 나뭇잎
가지에서 외롭게 팔랑거리고 있는
잎사귀는 단하나, 새도 한 마리
이제는 나의 마음에도
오직 하나의 사랑, 한 가락의 노래
그렇지만,시린 가을바람이 울고있어
사랑의 노래가락 들을길 없다
새는 날아가고 나뭇잎도 흩어지고
사랑 또한 빛바랬으니, 겨울이 오면
귀여운 새여, 오는 봄에는
내 무덤가에서 우짖어다오**********(고티에)
이 가을, 당신은 당신의 가슴 속에서 아직 따뜻한 체온으로 남아있는
한 남자 때문에 슬픈 얼굴이 됩니다.

가을은 당신에게 "떠나라"고 속삭입니다.
가을엔 떠나야 합니다. 무궁화호 정도가 좋을겁니다.
열차는 차창 밖으로 가을의 풍경을 넉넉하게 보여줍니다.
차창 밖에는 익어가는 들판에 수많은 가을의 동화가 씌어질겁니다.
작자미상의 아름다운 가을동화. 수확하는 농부의 성실한 얼굴과,
수건을 머리에 두른 시골아낙네의 등에 업혀 잠이 든 아이의 천진함,
지난 여름의 수해가 남기고 간 깊은 생채기의 흔적과,
외국인노동자들의 한숨으로 피어오르는 공장굴뚝의 연기,
흐르는 강물 위에 위태롭게 놓인 철교를 지나가는 열차의 진동이
당신의 가을여행을 함께 할겁니다.
어디론가의 떠남은 아름다운 일탈입니다.
잠시 자신의 일상에서 탈출해, 새로운 세계로의 은밀한 진입을 하는
겁니다. 그리하여 당신으로 하여금, 더 이상 낡은 추억의 바이러스가
당신의 삶을 갉아먹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K.F.구코는 "사랑은 상실이고 단념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다
주었을 때 더욱 풍부해진다"고 썼습니다. 당신은 바로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주었었고, 그래서 더욱 풍요로운 사랑을 했던 것입니다.
비록 그 사랑이 완성되지는 못했다하더라도, 당신이 했던 사랑은
충분히 값진 것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인스턴트 섹스가 난무하고
돈으로 사랑을 사고 파는 세상에, 당신의 사랑은 충분히
의미있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그랬지요. 사랑을 하고 잃는 것이
사랑을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적어도 당신에게는 먼훗날, 아무도 모르게 떠올려볼 수 있는
젊은날의 추억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함께 있는 사람을
열심히 사랑하고 있을 것이며, 그 옛날의 추억은 그저 한장의
색바랜 사진처럼 박제되어있을테지만, 그래도 인생의 한
시절에 남겨진 아름다운 전설이 되어줄 것입니다.
이 가을, 여인이여 저 가을 속으로 한번 떠나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