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에 썼다는 이야기니까 사실인거 같은데..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고 말한다지만,
정치적인 생각에서 바뀌었다고 말하는게 아닌지 모르겠군요.
개인적으로 생각하던 노무현 후보의 모습에 비추니 정말 깨는 모습이군요..
노 후보는 자서전에서 "자라나는 동안 '칠거지악' '여자의 시집살이는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여자와 명태는 두들겨야 한다' 등의 말을 많이 들어왔고, 여성을 장식물쯤으로 생각하는 사고가 내 머리 속에 자리잡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젊은 시절의 노 후보는 그런 사고방식에 젖어있었는데, 지금의 부인과 연애 끝에 결혼하고 보니 자신이 말을 명령조나 억압조로 하면 부인이 그걸 따지고 들고, 심하면 집의 가풍, 개인의 습관을 비난하기도 했다는 것.
"작은 말다툼도 걸핏하면 싸움으로 비화되기 일쑤였던 신혼초기에 견딜 수 없는 초조감과 불안감에 급기야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남편이 되고 말았다"는 게 노 후보가 아내에게 손찌검한 내막이었다.
노 후보의 이 같은 사고방식은 고시 합격 이후에도 바뀌지 않아 갓 결혼한 동료들이 '아내 위에 군림할 수 있는 비결'을 물으면 "조져야 돼. 밥상 좀 들어 달라고 하면 밥상을 엎어 버리고, 이불 개라고 하면 물 젖은 발로 이불을 질겅질겅 밟아 버리는 거야. 그렇게 해야 꽉 잡고 살 수 있는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로서 매우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결혼할 당시 우리 집은 농사가 많았다. 형님 내외는 직장 따라서 부산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시부모 모시고 농사 수발을 하는 일은 아내의 몫이었다. 그러니 아이 키우랴, 집 청소하랴 음식을 장만해서 들에 갖다 주랴, 그 고생이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공부한답시고 모내기하는 날에도 내다보지도 않았으니......
그러나 나는 아내가 조금이라도 불평을 하면 소리를 질러 대었고, 그 말에 심하게 반발을 하면 다시 손을 올려붙였던 것이다. 정말 기억하기에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시에 합격하고 나서 연수원에 다니던 시절, 나는 아내를 다루는(?) 일을 무척이나 힘들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나보다 나이가 어린 연수원 동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듯 했다. 그 친구들이 보기에는 나야말로 아내 위에 군림하는 남편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어느 날 갓 결혼한 친구들과 함께 소주병을 들고 수유리 뒷산에 올라갔던 일이 있었다. 친구들중 하나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어떻게 노 형은 형수님을 그렇게 꽉 잡고 삽니까? 비결이 뭡니까?"
나는 그 자리에서 무슨 인생의 대선배나 되는 듯이 대답해 주었다.
"조져야 돼. 밥상 좀 들어 달라고 하면 밥상을 엎어 버리고, 이불 개라고 하면 물 젖은 발로 이불을 질겅질겅 밟아 버리는 거야. 그렇게 해야 꽉 잡고 살 수 있는 거야."
물론 농담이었지만, 전혀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것이 나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었다.
- 83년경, 부산에서 운동권 청년들이 만든 공해 문제 연구소에 내 사무실의 일부를 내주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나는 청년들과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어느 날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 중에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나는 대뜸 이렇게 농담을 했다.
"그래도 남자한테는 여자가 서너 명은 항상 있어야지. 한 명은 가정용, 한 명은 함께 춤을 출수 있는 뺑뺑이용, 그리고 또 한 명은 인생과 예술을 논하는 오솔길용, 이정도는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순간 청년들의 얼굴 색이 갑자기 변해 버렸다.
"아니, 변호사님이 어떻게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청년들의 표정은 농담이 아니었다. 나는 참 난처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었다. 여학생이 화내고 덤비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남학생이 펄쩍 뛰는 것은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나는 그 자리에서 무안을 당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