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씨 당신에게 사과드립니다
노창현 : 2003-01-07 오후 11:18:25
이따금 신문의 부고란을 보면 아무개씨 상배(喪配)라는 말이 나옵니다. 처음 그 단어를 봤을 땐 무슨 뜻인가 했습니다. 알고보니 아내를 잃었을 때 쓰는 상처(喪妻)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상처라는 낱말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자식을 잃은 것과는 또다른 애잔한 느낌이 전해집니다. 동음이의어인 상처(傷處)때문일까요. 마치 무언가가 마음을 심하게 할퀸,그래서 아픈 생채기로 남은듯한 느낌이 들곤 합니다.
국민가수 조용필씨가 깊은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지난 6일 다시 못올 곳으로 영원히 떠나버린 아내 안진현씨의 빈 자리가 그이에게는 채우기 힘든 상처인가 봅니다. 94년 3월 40대의 중년에 만나 결혼한 두 사람은 참으로 정겨운 잉꼬부부였다고 합니다. 안진현씨는 그이에게 사랑하는 아내이자 한없이 다정한 친구같은 존재였나봅니다. 부고를 전하는 스포츠신문들이 약속이나 한 듯 조용필씨의 히트곡 '친구'와 '허공'을 빗대었듯이 말입니다.
저는 조용필씨에게 마음의 빚이 있습니다. 공교롭게 그 빚은 조용필씨의 결혼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조용필씨는 대수롭지 않다며 오래전에 잊었을 터이지만 저는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미안할 따름입니다.
대부분의 팬들이 그러하듯 저도 조용필씨를 처음 알게 된 것은 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했을 때입니다. 비교적 쉽고 애조띈 멜로디에 구슬픈 노랫말이 마음속 깊은 심연에서 슬픔과 그리움을 퍼내는 그 노래에 사람들은 빠져들 수밖에 없었지요.
조용필씨는 69년 컨트리웨스턴그룹 '애트킨즈'를 결성해 주한미군무대에서 가수활동을 시작했습니다. 71년에는 선데이서울컵 팝그룹 콘테스트에서 '님이여'로 최우수가수왕상을 수상하는 등 실력파가수로 인정받았지만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뜰때까지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일약 주목받는 가수가 됐지만 안타깝게도 조용필씨는 얼마안가 대마초사건에 연루돼 가수활동이 중단됐습니다. 지금은 대마초보다 더한 스캔들이 있어도 거뜬히 재기하는 연예인들이 많지만 당시엔 대마초사건에 한번 연루되면 변명한마디 할 수없이 엄청나게 지탄받는 분위기였습니다. 특히 그이같이 겨우 신인 신세를 면한 가수의 재기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지요. 2년여 세월이 흘렀을까요. 그이에 대한 방송출연금지 제재는 풀렸지만 불러주는 곳은 거의 없었습니다.
'서울의 봄'이라 불린 80년 어느 봄날 우연한 기회에 그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한 대학교의 행사장이었습니다. 무슨 행사였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돌아가신 함석헌 옹과 문익환 목사 등 민주화운동에 힘쓴 인사들의 강연이 1부 행사에 있었고 2부 행사에 가수들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그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조용필씨였습니다.
자신을 잊지 않은 사람들의 성원에 조용필씨는 다소 수줍어하며 감사를 표했습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는 그이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습니다. 이어 부른 노래는 처음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저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듯 전율감이 일었습니다. 영혼을 불러내는듯한 목소리라고 할까요. 그 노래는 너무도 유명한 '창밖의 여자'였습니다.
'창밖의 여자'는 당시 저같은 신세대는 물론이고 기성세대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나봅니다. 그로부터 몇 달후 아버지가 등산을 다녀오시더니 제게 그러시더군요. "오늘말이야~등산길에 어디서 조용필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기가 막히더구나. 그렇게 훌륭한 노래는 처음 들었어..."
사람 인생이 이름따라 가는 모양입니다. 74년 결성된 '조용필과 그림자'는 '사랑의 자장가'라는 명곡을 타이틀로 내세웠지만 그냥 묻혀버렸지요. 그런데 80년 '그림자'를 '위대한 탄생'으로 바꾼 덕인지 '창밖의 여자'는 요즘말로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길거리 어딜 가나 조용필씨가 특유의 혼신을 다하는 목소리로 "나를 자~암들게~하~라~~"는 것을 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3월에 '창밖의 여자'를 발표하고 그이는 그해 6월 미국 카네기홀에서 열린 교포위문공연
에 다녀왔는데 그사이 '창밖의 여자'가 국내에서 어마어마한 히트한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진 모습이었습니다.
이후 그이는 2집 앨범 '촛불' '미워미워미워' '고추잠자리' '못찾겠다 꾀꼬리' '눈물의 파티' '일편단심 민들레야' '허공' '꿈' 등 줄줄이 히트곡을 발표했습니다.그이는 최초로 '오빠부대'가 따라다닌 가수였습니다.한국가요사상 그만한 국민가수가 있었을까요. 80년대 '오빠~'를 외치던 여학생들이 30~40대의 중년이 된 지금도 조용필씨 공연장에서 '오빠~'하고 불러댄다니 그이의 인기는 시대를 초월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자도 조용필씨를 어찌나 좋아했던지 LP와 테이프를 사는것만으로 성이 안차서 그가 출연한 영화까지 봤을 정도입니다. 제 기억으로 조용필씨가 출연한 딱 한편의 영화가 있습습니다. 80년 유지인씨와 함께 열연한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감독)입니다. 서울 중앙극장에서 상영된 '그 사랑~'은 흥행에도 성공했습니다.저말고도 본 사람들이 많았으니까요.^^ 나중에 조용필씨 회고담을 들으니 그 영화에서 유지인씨와 키스신과 베드신이 있었는데 사정사정해서 베드신은 겨우 뺐고 키스신도 하도 NG를 엄청 내고 간신히 찍었다는군요.
세월이 흘러흘러 제가 두 번째로 조용필씨를 만난 것은 연예부 기자가 된 92년 겨울이었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조용필씨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된 일이 생겼지요.
아시겠지만 조용필씨는 84년 첫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슈퍼스타의 결혼치고는 대단히 소박하고 은밀하게 열려 화제가 되었지요. 광릉 수목원 근처 봉선사에서 스님의 주례하에 신랑신부 달랑 두사람의 결혼식이 열렸고 하객은 연예 주간지 기자 7명이 전부였으니까요. 뭔가 말못할 사정이 있었을까요.
그당시 결혼식을 취재했던 어느 선배가 훗날 그러더군요. "기자들 때문에 반강제로 치른 결혼식이었다"구요. 순전히 제 추측입니다만 아마도 당사자들은 그때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기자들의 극성때문에 자칫 스캔들화가 우려됐고 서둘러 결혼식이 거행된게 아닌가하는 생각입니다. 어쨌든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고 조용필씨는 그후 독신생활을 계속했습니다.
92년 겨울 저는 5년차 기자였지만 연예부로 발령받은지 얼마 안돼 미숙한게 많았습니다. 방송기자로 KBS를 출입하던 제가 매일같이 들른 곳이 있었는데 '밤으로 가는 쇼'제작 사무실이었습니다. 심야토크쇼인 '밤으로~'는 KBS 2TV에서 주2회 편성된 인기프로였습니다. 임성훈씨와 미스코리아출신 장윤정씨가 진행하고 개그작가 전영호씨가 감초로 출연했지요. 인기 연예인들이 초대손님으로 출연하니 재미난 화제거리가 많이 나왔지요.
어느날 들렀더니 다음주에 조용필씨가 나온다는 겁니다. 대충 무슨 내용인지 취재를 했지요.(혹시 모르시는 분들이 계실까봐 설명을 하자면 보통 토크쇼 출연자가 결정되면 해당프로 구성작가가 사전에 취재를 나갑니다. 주고받을 얘기를 토대로 일종의 대본을 만듭니다. 방송 전날정도 녹화를 하고 편집을 거쳐 방송이 나가게 되지요.)
조용필씨가 결혼 얘기를 할거라는 말에 구미가 당겼습니다. 그동안 조용필씨는 재혼여부에 대해선 한번도 얘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막말로 조용필씨가 "이젠 결혼하고 싶다"는 말만 해도 기사가 되는 것이었죠. 더구나 원하는 스타일까지 말한다니 신참 연예기자로선 '짭짤한 꺼리하나 잡은 셈'이었지요.
이튿날 데스크에 보고한 후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1면에 '조용필 공개구혼'하고 제목이 너무 부각된 기사가 나가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TV를 통해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이니 굳이 틀린 제목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조용필씨가 결혼얘기만 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과장됐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일이 벌어졌지요.조용필씨가 아니라 경쟁지들때문이었습니다.공개구혼 기사가 나가자 경쟁지들은 '밤으로~'제작진에 사실 여부를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쾌재를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조용필씨가 아직 녹화에 들어가지 않았거든요. 조용필씨가 녹화를 끝낸후에 기사를 썼어야하는데 경험이 부족한 제가 너무 일찍 기사화하는 바람에 문제가 생긴겁니다.
경쟁지들은 바로 조용필씨측에 압력을 넣었습니다. 결혼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지말라는 것이었지요. 이번엔 우리쪽이 다급해졌습니다. 가만 있다간 대형오보사태가 나서 바보가 될 판이었으니까요. 조용필씨와 안면있는 고참 선배 한분이 나서 "예정대로 결혼얘기를 해야 한다"고 애원반 으름짱반 사정했습니다. 정말 웃지못할 코미디였지요. 한쪽은 "얘기를 해라",또 한쪽은 "얘기하지말라"고 성화를 했으니 양쪽 기자들을 잘 아는 조용필씨는 얼마나 난처했겠습니까.
문제를 일으킨 저는 그저 미안할 따름이었지요. 다음날 녹화장에 갔습니다.출연자 대기실에 조용필씨가 와 있더군요. 슬그머니 다가가 스포츠서울 아무개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그러세요.반갑습니다"하더군요. 그때만 해도 조용필씨는 문제의 기사를 쓴 장본인이 저라는 걸 몰랐습니다.
곧바로 이실직고 했습니다. 제가 '문제의 기자'라구요.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조용필씨 얼굴이 굳어지더군요. 그동안 얼마나 시달렸는지 짐작이 갔습니다. 험한 소리 들을 각오를 하고 있는데 조용필씨는 금세 얼굴을 활짝 폈습니다. "아이구~내 그 기사 때문에 힘들었어요.허허허~"하고 웃어주는게 아닙니까.
조용필씨가 사람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정도 시달렸으면 기분나쁜 소리를 할만도 한데 너그럽게 이해해주는 모습에 솔직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젊은 기자가 일욕심이 많아 생긴 일이겠거니 한것이었습니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황망함에 저는 제대로 말도 못하고 물러나왔습니다.(조용필씨는 그날 녹화장에서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결혼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기는 했지만 특별히 강조하지 않고 슬그머니 넘어갔거든요.)
그런 해프닝이 있고 1년여 세월이 지난 94년 3월 조용필씨의 결혼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재미동포 안진현씨의 결혼이후 그이는 정말 행복해보였습니다. 결혼 4년째이던 해 여성동아가 실었던 인터뷰 내용을 조금 소개해 드립니다.
“미국생활을 오래한 마누라가 오히려 저보다도 한국적입니다. 외국에 나가도 김치없으면 밥을 못먹어요. 결혼한 후 얼마간은 부엌에서 혼자 밥먹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저도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지녔지만 이 사람은 저보다 더 보수적입니다. 요즘은 저와 함께 식탁에서 밥을 먹는 습관을 들여 놓았습니다.”
정말 상상도 못할 안진현씨의 모습이었다. 세계적인 재벌회장들을 손에 쥐고 비즈니스를 하여 ‘호랑이’란 별명까지 얻은 그녀가 동갑내기 남편에게 이렇듯 순종적일 수 있는 것일까?“다 남편을 굉장히 사랑하기때문이지요. 남편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거지요. 음악하는사람이 예민하고 다혈질인 것은 당연하잖아요. 그런 것엔 전혀 불만이 없어요. 오히려 자상하고 따뜻한 면이 더 많고 아주 가정적인 분이세요.”
“우리 둘은 성격도 비슷하지만 식성도 비슷해요. 그이랑 전 닭고기,돼지고기는 무척 싫어하고 생선, 쇠고기를 좋아하거든요.특히 된장찌개, 우거지국처럼 토속적인 음식을 좋아하지요.음식장만은 10년째 도와주시는 아주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별 어려움은 없습니다. 단지 남편이 워낙 술과 담배를 좋아해 건강을 해칠까봐 걱정이에요. 보약과 비타민제를 드리고 있지만 말입니다.”
7남매 막내인 조용필씨와 10남매 맏이인 안진현씨는 누가 보아도 천생연분처럼 보인다. ‘두사람이 왜 진작 만나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생길 정도로 너무나 편안해 보이는 한쌍이다. 결혼 3년이 지나도록 아직 이렇다할 부부싸움을 해본 적이 없다는 두사람. 40대에 결혼해서 언제나 신혼같은 부부애를 유지하는 비법을 조용필씨에게 물어보았다.
“결혼후 2~3년이 고비라는 이야기를 선배들로부터 많이 들어서 저도 내심 걱정을 했습니다.두번 실패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우리 부부의 싸움은 ‘소싸움’에 비유하고 싶군요.한쪽 소가 등을 돌리면 싸움이 깨끗이 끝나며, 등을 돌린 소를 다른 소가 치받는 경우가 없는 것이 소싸움 아닙니까. 제가 화를 내면, 그 이유가 비록 제게 있다 할지라도 안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잘못했다고 사과를 합니다. 그러고는 방한쪽 구석에서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인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 아내를 보면 가슴이 찡해져요.이런 마누라와 어떻게 싸움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를 이해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이 사람과 결혼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용필씨는 인터뷰 중간에 결혼은 운명이라는 말을 자주했다. 그렇다면 비록 조금 늦게 찾아왔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마음먹은 그에게 최고의 반려자를 선물한 운명에게 감사를 해야할 것 같다.
“결혼 초부터 자녀계획은 없다고 밝혔고 지금도 자식에 대한 욕심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를 보면 예쁘지만 이젠 저와 아내를 위해 살고 싶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볼때 오직 음악에만 열정을 쏟느라 저자신을 너무 혹사시켰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식들도 크면 결국 부부만 남는 법, 제게는 마누라밖에 없어요. 그러니 지금부터 마누라한테 잘해야겠죠? 늙으면 결국 꼬랑지 내리고 마누라에게 기댈테니까요(웃음).”
조용필씨는 언젠가는 로드 스튜어트가 아내를 위해 곡을 썼듯이 자신도 모든 남편들이 아내에게 주는 마음을 대표해서 아름다운 곡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식이 없는 이상,재산을 물려줄 필요도 없으니 자신이 죽는 그날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토록 사랑하는 반려자를 먼저 떠나보낸 조용필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요.
조용필씨!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노래로,저는 늘 행복했는데 정작 당신이 슬퍼할때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군요.
고작 한다는 말이 십여년전 풋내기 기자의 과욕으로 당신을 힘들게 한 것을 사과한다는 것밖에는요.
부디 힘을 내십시요.
'모든 남편들이 아내에게 주는 마음을 대표해서 아름다운 곡을 만들겠다'고 하신 당신의 마음을 언제까지나 기억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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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sportsseoul.com/special/newsman/read.asp?part=tm&num=13982&view=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