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458

봄밤(신경숙 J이야기中)


BY 감동.. 2003-02-05

목련꽃이 질 무렵이다.

한편에서는 라일락이 피고 있는 아름다운 봄밤이다.

J는 팔짱을 끼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밤이 깊은 골목길의 외등이 앞집 담장의

키큰 수목을 비춰주고 있었다.

J의 마음은 한없이 우울하였다.어떤 유행가 가사처럼

금방이라도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골목길에서

나타날것만 같았다.

자신이 결국 다시 그남자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J는 한없이 자존심이 구겨졌다.

그는 한때 J를 짝사랑하던 남자였다.짝사랑에도 기승전결이 있는법.

자신을 사랑하는 그를 지켜보는 일은 설레었고 얼마간은

아름다웠으나,그가 다른여자와 결혼을 해버렸다.

곁에 있을때는 모르겠더니 그가 결혼한다고 통보해왔을때도

그저 그렇더니 그없이 맞이한 봄.......

그리고 밤,J는 왠지 적막해서 거울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울속에서 이제 그리움이뭔지도 모르는 얼굴하나가

J를 쳐다보았다.손바닥을 펴서 얼굴을 문질러 보았다.

잠깐 구겨졌다가 펴지는 얼굴.

한때 그는 J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보며 네눈속에는

세상이 다 들어있어,했었다.J의 손을 잡으려들며 네손은

봄볕보다 따뜻해,했었다.J의 목덜미에 손을 집어넣으려하며
이보다 더 보드라운건 없을거야,했었다.

죽을때까지 네편이야....했었다.

J는 거울앞에서 물러앉아 책상에 앉아봤다.

책상은 홈이 파여있고 금이 가있었다.J는 괜히 책상의 홈과 금을

손바닥으로 짚어보다가 일어나 창문을 드르륵 열었다.

어느집에 피어있는 라일락향기가 봄밤바람결에 묻어 은은히도 맡아졌
다.
J는 그향기속에 훅 한숨을 실어 날려보냈다.그래도 밀려오는

무력감과 나른함을 물리쳐보려고 무릎을 껴안고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땅히 전화할 친구도 없었다.듣고 싶은 음악도 없었다.딸기라도

꺼내다 먹어볼까 했지만 냉장고문을 열기도 귀찮았다.

J는 새끼손가락으로 방바닥을 콕콕 찍어보았다,가로세로로 금을

그어보았다,다리를 쭉펴고 크게 숨을 쉬어보았다,다시 무릎을 끌어안
고 손깍지를 끼어보았다.

난데없이 눈물이 툭 떨어졌다.손바닥으로쓱쓱 닦았다.

아,한숨을 쉬면서 우연히 쳐든 J의 시선속으로 구석에 박혀있는
전화번호부가 들어왔다.

J는 의미있게 웃으며 전화번호부를 구석에서 끙끙거리며

끌어당겼다.워낙 구석에 박혀 있던 터라 J가 힘세게 잡아당기자

전화번호부 겉표지가 쭉 찢겨버렸다.J는 찢긴 겉표지를 둘둘 말아 쓰레기통에 넣어버리고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J는 어느 이름앞에서 페이지 넘기는 것을 멈췄다.

수화기를 끌어당겨 번호를 콕콕콕,눌렀다.

벨이 울리고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거기 김방구 씨 댁이죠?"


"그런데요."


"김방구 씨 바꿔주세요."


"....전데요."


J는 갑자기 할말이 없었다.처음엔 그런 이름이 정말 있을까?

확인해보려고 전화번호부를 뒤졌고 그런이름이 있어 심심해서

번호를 눌러보았지만 김방구 씨 본인이 받을줄은 몰랐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라일락향기는 봄밤 바람결을 타고 J에게로 날아왔다.

김방구 씨가 수화기 저편에서 물었다.


"....누구시죠?"


J는 잠깐 수화기를 든 채로 멍하니 앉아있었다.


"....누구시냐니깐요?"


"......"


"....여보세요?여보세요?"


".....뽕!"


J는 얼른 수화기를 내려놓았다.